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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무 시인 / 반딧불이
서산마루에 초승달 희미한 호롱불처럼 걸려 있어 깜깜하던 하늘 전체가 아늑한 오두막 되면
등잔에 기름 떨어져 불도 못 켜고 가슴만 졸이던 개똥벌레 한 마리 비로소 마음속에 반딧불 밝히고 길을 찾는다
김영무 시인 / 산길 걸으며
등산로 입구 뭇 발길들이 꽝꽝 다져놓은 단단한 흙길
경칩 다음날 비 개인 아침 평시엔 딱딱하던 그 길은 는개비 가랑비에도 진흙 죽탕
그러나 그 입구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금세 푹신한 산허리 낙엽 밟힌다
발목까지 빠진 엉망진창 신발짝 눌눌한 억새풀섶에 썩-썩-닦아 신고 한참 산길 걷다가 고개 들어 산을 본다
바람결에 얼핏 동박새 울음 같은 산새소리
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
밟으면 밟을수록 풀밭은 더욱 푸르다지만 밟히고 밟힌 김에 스스로 밟고 또 밟아
꽝꽝 다져진 길 우리네 마음길 물 한방울 빠지지 않는 단단한 길
가랑비에 여우비에 진창길 된다
장마비 열사를 퍼부어도 물 쑥- 쑥- 스며들어 늘 눅눅한 길 비가와도 눈이 와도 산길은 진흙탕길 되지 않는다
김영무 시인 / 가상현실
암선고를 받은 순간부터 (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다) 너의 세상은 환해진다 컴퓨터 화면 위를 떠도는 창문처럼 기억들이 날아다닌다 원시의 잠재의식도 살아나서 뚜벅뚜벅 걸어오고, 저 우주에 있는 너의 미래의 별똥들이 쏟아진다 어둠은 추방되고, 명암도 무늬도 사라진, 두께도 깊이도 무게도 지워진, 노숙과 밥굶기와 편안한 잠과 따뜻한 한끼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칸막이가 허물어진 환하디 환한 나라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암세포들의 세상 지독한 오염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미국자리곰, 황소개구리, 실지렁이, 거머리가 못 되어 시름시름 힘을 잃고 약자로 전락한 어느 순간부터 경쟁력 없는 자 솎어버리는 구조조정의 덫에 걸린 너의 삶은 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시집 {가상현실} (문학동네, 2001)
김영무 시인 / 마니피카트1
이 절망, 이 캄캄한 억지 받아들이라니 받아들이라니 암환자의 두려움이 이만할까 죽음의 선고를 받아들이라니
얼마나 겁났을까 얼마나 겁났을까 처녀의 몸으로 사생아를 낳으라니
체념으로, 오기로 불안한 기대로 될 대로 되라지(Let it be) 했더니 그 절망 모르는 사람들은 말하네 지혜로운 순명이었다고
말기 암환자의 절망이 낳은 천지개벽의 꿈으로 불러보는 노래 Magnificat 내 영혼이 내 영혼이 당신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 마리마의 노래 : 누가복음 1장 46절~55절
-시집 {가상현실} (문학동네, 2001)
김영무 시인 / 불꽃놀이
이 무슨 난데없는 불꽃놀이냐 이 내 몸뚱이 가운데 토막에 무슨 큰 경사라도 난 모양이다 왼쪽 옆구리에서 초저녁에 폭죽 하나 눈부시게 치솟더니, 등허리를 돌아 오른쪽에서도 폭죽 치솟아 여기저기서 기어이 불꽃들 꽝꽝 터진다 연사흘 한 주일을 밤낮없이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되는 통증의 불꽃놀이 몸의 한복판을 찢어 열어놓은 아픔의 신천지 통증의 강고한 철권정치 아, 아픔 없는 나라에 살고 싶어라 암세포들의 완전 입성을 축하하는 잔치인가 힘줄 한 올 한 올 살점 한 점 한 점 환하게 밝히며 백골의 갈피갈피마다 시나브로 흩날려 쌓이는 송이송이 꽃불 떨어지는 불꽃 눈부시지만 새로 치솟는 불꽃 더욱 찬란하구나 하늘의 별들을 우러러 몸부림치며 기도를 올리려 하나 악문 어금니라 입술조차 열리지 않는구나 통증은 스스로 눈부신 발광체 뼈마디 마디가 참숯이 되어 내 몸뚱이 가운데토막에 잉걸불 탄다 한 달 이상 지속되는 무지막지한 이 불길 속에 무슨 바늘 같은 새 생명이라도 하나 벼려낼 수 없을까 진땀 방울 영롱히 까무러치는 아, 황홀한 불꽃놀이 진통(陣痛)이거라 진통이거라
김영무 시인 / 게쎄마니에서
절벽 아래로 하염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어디선지 날개 소리 들리면서 누군가의 손길이 왼쪽 겨드랑이 아래 수술한 상처자국을 이루만지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날개를 단 아주 작은 무엇인가가 내 몸의 속도에 맞추어 날면서 상처 주위를 맴도은 것이었는데
이 작은 것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아기천사들 같기도 하고, 무슨 새 같기도 하고, 꼬마악마 같기도 해서 으아해하는 중에 땅바닥에 나뒹굴며 깨달으니 낙하산을 타고 내린 듯 아무런 충격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꽃이 만발한 과수원, 향기로운 바람은 머리칼을
스치고, 나뭇가지 사이로 새벽인지 황혼녁인지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었고 작은 새 같은 것들 수십 마리 나무 속으로 꽃 속으로 스며들어, 꽃들의 만발한 노래일까 새들의 흐느낌일까 나무 전체가 노래였다 황홀한 통곡나무들, 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어느 풋봄의 흙 속 깊이
묻혀 있었고 가만히 보니 나의 염통에서도 노래꽃나무 한 그루 솟아나와 뿌리들이 허파로 밥통으로 간으로 콩팥으로 창자 속으로 구석구석 뻗어 양분을 퍼올리고 지저귀는 꽃잎들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낳고 죽음이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 진짜 삶이지, 가냘픈 통곡 사이로 언뜻언뜻 아기천사의 설득 같기도 하고
꼬마악마의 웃음소리 같기도 한 것 죽음은 생명의 원수야, 아니야 죽음이 없으면 탄생도 없어, 저기 벌레 먹은 꽃잎, 시든 꽃잎들 보이지, 너는 어떡할래 이런 새들의 지저귐 엿듣다가 펄떡 깨어나 겨드랑이 아래 상처를 다시 만져보았다 분홍빛 새살이 돋고 있었고 하늘색 꽃송이들
흩날려 떨어지는 것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순간 나도 몰래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나는 현대의학의 배교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방사선이 당신 성령의 뜨거운 불일지라도 항암주사액이 검붉은 포도주일지라도, 이번만은 제 뜻대로 이 잔 거두소서 이 몸 아직은 살아 있기 원하오니
-시집 <가상현실> 문학동네 2001
김영무 시인 / 어머니
춘분 가까운 아침인데 무덤 앞 상석 위에 눈이 하얗다. 어머님, 손수 상보를 깔아놓으셨군요. 생전에도 늘 그러시더니 이젠 좀 늦잠도 주무시고 그러세요. 상보야 제가 와서 깔아도 되잖아요.
김영무 시인 / 겨울나무
사람들이 옷을 껴입는 겨울에 왜 나무들은 옷을 벗을까
둥근 어깨며 겨드랑이 가지끝 실핏줄까지 청산리 자작나무는 왜 홀랑 드러내는가
눈송이 펄펄 꽃처럼 날리는 한밤중 춤출 수 없는 몸이라면 차라리 꼿꼿이 서서 얼어죽겠다?
깨질 듯한 하늘 찬바람 등등한 서슬에 낮달이 썩썩 낫을 가는 속수무책의 대낮,
검먹고 숨죽인 봄햇살 유혹하려면 어쩌란 말이냐 무등산 겨울나무는 알몸의 신부가 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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