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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찬 시인 / 깨꽃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6.

김기찬 시인 / 깨꽃

 

 “야야 깻잎김치 담가 놨다, 니들 입맛에 맞을랑가 모르것다. ”이른 아침 갑골이 다된 노인네한테서 쩌릉쩌릉 전화가 왔더란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매상마을에 아흔을 훌쩍 넘긴 홀몸 노인네가 살았더란다. 장마가 끝나기 전 어느 날, 마을회관 점 십의 민화투 판을 젊은 노인들한테 슬그머니 물러주더란다. 죽음을 코앞에 둔 꼬부랑 노인네, 무슨 생각에선지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마당 한 가운데로 나서더란다. 30평 앞마당을 한 바퀴 삥 둘러보더니, 이 삶에서 얻은 기운 이 삶에 다 쓰듯 앉은걸음으로 흙 마당을 파 엎더란다. 하늘도 놀라고 마당도 기겁하여 저만치 달아났다 돌아오더란다. 하루아침에 마당을 잃은 집은 노발대발 삿대질을 해보았지만, 노인네는 콧등으로 받아치며 제일 무서워하던 잡초마저 마당 구석 밖으로 내 몰더란다. 내친김에 마당을 넘어 골목갓길까지 파고 또 파 엎더란다. 그러더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들깨 모가 마당가득 들어 찰 때까지 삭아가는 엉덩이가 온 땅바닥을 훑고 다니더란다. 금세 파란물이 벙벙히 들어찬 방죽이 되더란다. 방죽이 모자라 파랑파랑파랑파랑 깻잎파도가 넘실 거리더란다. 넘실거린 파도가 골목까지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더란다. 그때서야 신이 난 마당도 덩달아 대낮같이 환한 깨꽃덕석을 깔아놓더란다. 벌 나비들도 이때다 하고, 여러 날 째 잔치를 벌이다 깨꽃향기 따라 팔랑팔랑 여름을 노 저어 가더란다. 풀벌레 소리가 깨알로 또록또록 여물어 갈 무렵, 깨벌레가 다 된 노인네, 신경통 앓던 다리 퉁퉁 부어오른 것도 모른 채 택시 불러 부랴부랴 줄포 오일장에 가더란다. 줄포 오일장에 다녀와 자식들한테 먼저 수화기를 들더란다.

“야들아, 들깨지름이 사람 몸에 그리 좋단다. ”이생에서 얻은 삼만 평 다랑밭 얼굴에 낯꽃이 벌어 온 동네가 꼬순 내로 진동을 하더란다.

 


 

 

김기찬 시인 / 시골집은 안녕하시다

 

​오랜만에 아내와 홀로계신 시골집을 뵈로 갔다

꺼르막의 잡풀들은 새하얗게 기가 죽어 있었다

오래된 집을 오래토록 건사해온 살붙이들이 안쓰러웠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허리가 아픈 도구통도

볼품없는 장독대도 장독대에 모여 앉은 민들레도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꽃이 한창이시다

수돗가 사기요강은 대소변을 잘 받아내시는지

헌 테레비는 명창들의 구성진 가락을 국숫발처럼 잘도 뽑으시는지

벽시계의 초침은 얼마나 힘이 남아도는지

수도 검침원처럼 일일이 확인하고 기록한다

아내는 쪽마루에 앉아 홍매실에게나 눈을 주다가

마당 밭에 나가 달롱개를 캐고 쪽파를 다듬고 있다

백열등은 점차 시력이 떨어져 침침해 하시고

골다공증으로 무릎 뼈가 시린 명아주 지팡이도

토방의 먹 고무신도 바깥 마실 길이 궁금해 뒤집혀있다

보일러실의 보일러도 웅얼거리며 구석구석 따뜻한 피를 잘 돌리시고

정짓간의 부뚜막은 그대로 먹빛이시다

늙어간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애처롭고 쓸쓸하고 짠한 것이지만

나름대로 다들 간신간신 다복하시다

눈가에 마를 새 없이 진물 흘리는 수도꼭지를 단단히 조이는 사이

험한 세월 만나 둔해진 몸 이끌고

1세기를 잘 건너시는 것을 느긋하게 바라보다가

먹먹해진 눈빛의 아내가 봉다리봉다리 봄을 챙겨 차에 싣는다

웃자란 걱정은 며칠 지나 다시 나를 잡아끌겠지만

말캉 구석에 빨깡 짜놓은 걸레를 보면 그나마 안심이 된다

 


 

김기찬 시인 / 고요한 고요

-요양병원

 

 

나는 오늘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고요를 보고 왔습니다

대학병원 중환자실

뼈만 남은 환자복들이 산소 호흡기를 꽂고

미리 관 속에 들어가 보는 고요를

침대이자 무덤인 고요를

천장에 핏기도 물기도 없는 빼빼 마른 형광등 하나가

죽음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지

갑자기 눈이 멀 것처럼 발광하는 고요를

안간힘으로 살 만큼 살아본 고요를

늙기에도 지친 멀건 죽 같은 고요를

때가 되면 훌렁,

삶을 벗어버리면 그만인, 이 홀가분한 고요를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나날이 긴박한 고요를

하늘에도 바닥이 있고

땅에도 하늘이 있는

이승 끝과 저승 입구 어디쯤

나는 오늘 저승사자와 한패가 된 고요를 보고 왔습니다

겉은 검고 속은 흰

속은 검고 겉이 흰

죽음을 먹고 자란 적막한 고요를

누군가 막 태어날 것 같은 고요를

 

 


 

 

김기찬 시인 / 나만 모르는 이야기

 

 

직소폭포가 격렬하게 싸갈기는 기다란 물줄기엔 여러 마디가 있는데요

그 마디마디엔 희고 투명한 졸졸졸, 이란 의성어(擬聲漁)가 살고 있습니다

그 의성어는 맨살의 뱃가죽으로 바닥을 훑으며 백천내를 휘돌아나가고

앞서가던 졸졸졸은 뒤에 오는 졸졸졸을 끌고 변산바다에 이르는 동안에요

비늘도 지느러미도 없는 의성어는 자랄 대로 자라 철썩철썩 파도가 된다는

이 또한 나만 모르는 오래된 이야기

-시집 『멀리 달을 보는 사람』 중에서

 

 


 

 

김기찬 시인 / 누에

 

 

누에는 기차와 닮았다

한 마리 길다란 누에가 혼신의 힘을 다해

뽕나무 가지를 기어오르듯

기차는 뽕잎 갉아먹는 소리를 내며

멀리서 레일 위를 밟고 온다

실크로드를 향해 가는 동안

알卵에서부터 오령五齡역까지는 한 달이 걸린다

마침내 기차가 어둠의 터널에 들 듯

칸칸마다 투명한 누에는 허공 속 암흑에 든다

바람도

흙도

물도

마지막 출구도 없는, 암흑의 껍질은 희고 둥글다

갑자기 나는 숙연해 진다

저 한 평의 암흑을 짓고

아버지는 83년을 웅크렸다 나비가 되었다

 

 


 

 

김기찬 시인 / 울지 못하는 것들은 다 산으로 갔다

 

 

상한 몸을 하고,

한 마리 짐승과 또 한 마리 짐승과 또 한 마리 짐승을 거느렸다

 

저 벼랑을 키우는 귀먹은 바위들과

계곡에 모여 물과 바람으로 피고름 씻어내는 바위들은

한때 새파랗게 질린 짐승이었거나

순하디순한 사람이었으리라

 

지리산 피아골에서 보았다

짐승한테 물려 숨어든 봉두난발의 전봉준이도

죽창을 들고 결집한 흰옷의 혁명군들도

산으로 가 모두 바위가 되어 있었다

바위가 되어 한 덩어리 단단한 침묵으로 견디고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우뢰처럼 산문山門을 박차고 우르르 우르르 쏟아져 내릴 새날이 있으리란,

있으리란……산 같은 믿음 하나로

 

하얗게 웃을 때까지만 사람이던 짐승

그 짐승한테 덴 영혼들은 다 산으로 갔다

산으로 가 대신 울어주는 범종을 끌어안고

더운 숨 몰아쉬며 모두가 견디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를 어루만져 보았다

미처 내가 돌인 줄 알지 못했다

내가 뜨거운 피가 도는 차가운 바위임을 뒤늦게 알았다

 

아파도 울지 못하는 것들은 다 산으로 갔다

산으로 가 벼랑이 되거나 계곡에 숨어

단단한 바위 속에 더 단단히 뿌리를 박았다

 

 


 

김기찬 시인

1960년 전북 부안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자유문학」 신인상 당선.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바닷책』 『피조개, 달을 물다』 『채탄부 865-185』 『멀리 달을 보는 사람』. 석정촛불시문학상, 전북시인상, 한국미래문화상을 수상. 현재 변산 유유마을에서 시창작 지도 중. 《미당문학》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