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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시인 / 방
혼자 자취하는 방에 머무르면 호흡으로 나를 미행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한 방에 들어서면 나를 오래 떠돌던 흔적이 곤죽이 된 지도같이 뭉쳐져 있다
방은 구석이 아닌 적이 없다 나는 이곳에 거주하기 위해 이목구비,양쪽의 팔과 다리를 몰아넣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깜짝 놀라기도 한다“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방, 하면 회오리치다가 머무는 중력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방은 태어난다 불현듯 길목에 주저앉는 사람은 바람처럼 길을 돌다 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방으로 맺혀 있는 사람은 신호등이 바뀌고 뒤에 있는 사람들이 길을 재촉해도 눈의 초점이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견디고 있는 방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방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될 때 차오르는 방의 내부가 흘러가지 않도록 나는 가느다란 다리들을 뻗는다
바람이 불면 가느다란 다리들은 방을 더욱 흔들어 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시집 『신의 반지하』 끝과시작, 2023.
박유하 시인 / 붉은 신경의 밤
발꿈치의 굳은살을 핥으며 강아지의 혀는 붉은 신경을 발굴해냈다 붉은 신경은 잔류 같은 빛을 품고 어룽거렸다
쓸쓸하지 않은 벽은 없다 붉은 신경이 안에서 느릿느릿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벽이 살이 되기도 하면서
붉은 신경은 음악이 된다 어느 높은음의 꽃을 피우느라 붉은 신경이 전부 소진되어 버린 적이 있다 이렇게 피어난 꽃이 피어난 꽃이 허공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 있는 마음으로 한 계절이 지나고
문득 정강이처럼 도드라진 곳에서 붉은 신경은 극소량의 생명력을 품고 잠적해 있다가 꿈틀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소변이 배출되듯이 흘러가는 붉은 신경이 희망 같아서 나는 제발 이 흐름이 멈추지 않기를 바랐고
붉은 신경은 노을의 재료로 쓰이듯이 자꾸 어둠을 끌고 온다
강아지가 짖을 때마다 밤이 컹컹 공명하며 아무것도 없는 나를 확장시켰다
-시집 <신의 반지하> (2023)
박유하 시인 / 방청객
“우우” 함성이 눌러앉아 꿈틀거렸다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아” 우리는 그런 적이 있어 보이는 얼룩이었다 초저녁 같은 너의 목에서 또렷하지 않게 버티고 있는 낮달처럼 너의 얼굴은 밝기 위해 노력했다 “웃으세요” 푯말이 지나가고 우리는 동시에 깔깔 소리 내다가 점차 삭막해졌다 무대의 분위기는 상승했다 “환호성을 지르세요” 푯말이 지나가고 “우우” 우리가 소리를 높일수록 괴상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물의 왕국 같군요” 진행자의 말에 어떠한 푯말도 지나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미소 지었고 “혹시 그것이 이곳에 와 있는 건 아닐까요” 진행자의 말에 우리는 멈칫했다 카메라가 방청객이 있는 어둠을 향하자 화면에 짐승의 눈 같은 불빛이 어룽어룽 움직였다 “저게 뭐죠?” 진행자는 방청객을 주목했고 우리는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완벽히 어두워지는 본분에 집중했고 “으악” 비명과 함께 조명이 꺼졌다 우리는 우리에게 꼼짝할 수 없었고 조명이 켜졌다 엔딩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박수 치세요” 푯말이 지나가고 우리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것이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
박유하 시인 / 방 거래
“침대가 놓여있습니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구비 되어 있고 오랫동안 펴지 않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있습니다” “가구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방은 당신의 설명과 다르잖아요” “나는 사진에 나온 대로 설명했어요” 가스레인지와 냉장고, 화분, 옷장에 대해 이어 설명하면서 나는 분명 숨기는 것이 있었다 “식탁과 책상을 사면 이곳을 채울 수 있을까요?” 이미 사진 속 방에는 가구를 놓을 공간이 없었지만 나는 이곳을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창문을 보니 아침이었네요. 어떻게 이곳에서 나오셨어요?” “글쎄요, 아침에는 더욱 그러니까요” 나는 방에 대해 이토록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래도 나무가 잘 자라고 있어요” 우리는 유머 코드가 맞는다는 듯이 서로 웃었고 검은 개가 우리를 향해 짖다가 떠났다 사라진 울음이 귓가에 남아 맴맴 돌았다 우리는 방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앙상하게 남은 우리에게 집중하였다 애초에 나무만 있었다는 듯이
-시집 <탄잘리교>에서
박유하 시인 / 아르나
곤히 잠자다가 꿈도 없이 깨어나기도 하고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환청을 듣기도 하면서아르나는 번뜩 살아있다
바람이 멈추어도 바람 냄새가 나고당신이 보이지 않아도온종일 창문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는 건아르나가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페이지를 한 시간동안 헤매는 독서는아르나와 부대끼는 촉감이고
욕조에 몸을 전부 담그면아르나가 낮달처럼 아른아른 떠 있다
내가 먼저 그 방을 떠나면서무엇을 두고 온지 모르고무엇을 두고 왔을 때
아르나, 아르나, 커지기도 하고아르나, 아르나, 잠잠해지기도 한다
박유하 시인 / 우리의 기도
흔들리는 풀잎은 살냄새를 닮았다 바람을 따라 도로변을 떠도는 비닐봉지가 곁을 파고들듯이
곁의 깊이를 날게 된 딱 한 마리의 새가 이제 막 발견한 창공을 횡단한다 그러한 새의 날갯짓에는 살냄새가 난다
이미 수많은 흔적들이 지나간 떡볶이집 벽면에 우리는 이름의 이니셜과 하트를 작게 남겼다 흔적이란 우리로 이행하는 작은 무게를 깨닫는 방법이다 사라지는 흔적을 보며 새가 여전히 날아가고 있음을 가늠한 적이 있다 착지할 수 없는 바람을 오래도록 따라가다가 기어코 몰려오는 작은 무게를 새라고 부르는 마음을 우리는 그 순간 배웠는지 모른다
맞잡은 두 손의 살냄새를 맡으며 우리는 창공을 발견한 딱 한 마리의 새가 되었다
새가 지워지고 사라진 후에도 이윽고 두 손을 놓지 못하는 기도가 있었다
-시집 『신의 반지하』 (끝과시작,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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