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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수중 시인 / 흑백시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7.

박수중 시인 / 흑백시대

 

 

우울은 컬러로는 찍히지 않아요

꿈도 추억도 흑백일 뿐이지요

 

채플린의 페이소스는 컬러로는 상상이 되지 않지요

 

사진 자판기로 '인생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내 살아온 인생은

흑백으로 찍어야

무언가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컬러풀한 장면들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지요

표정도 흑백으로 짓고 네 컷 찍었어요

 

과거는 회색이지요

흑백의 실루엣에서만 그대가 보여요

상처가 흑백으로 인화됩니다

 

내 졸시는

흑과 백

그리고 애매한 회색만으로 쓰여집니다

 

-시집 《물고기 귀로 듣다》에서

 

 


 

 

박수중 시인 / 누군가 부르고 있다

 

 

내 평생 무시하며 앓아온 귓병이

오랜 시간 저절로 아물어

상처에 소리들의 잔해가 덧났나 보다

귀가 조금씩 어두워지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고 주위를 살펴도

그저 아득할 뿐이다

 

환청인가 생각하고 잊고 지나가면

어느새 다가와 또 부른다

내 생각 속 착각이겠지 흘려버려도

다시 시간이 지나 홀로

처마 낮은 골목길을 걷거나 비를 맞을 때면

아주 가까이 속삭이듯 지저귄다

 

도대체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살아있는 목소리인가

허공에서 찾아오는 소리인가

차라리 잘 안 들리는 모호함으로

오늘밤 꿈에는 아와지시마(淡路島)의

햇빛 쏟아지는 외딴 길 위로

날아다니는 나비를 찾아가야겠다

 

 


 

 

박수중 시인 / 드론

 

 

 문득 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대

 

 절름발이 같은

 그리움은

 한쪽이 짧다

 

 귀가 더 어두워졌다

 지구가 아름다워진다

 

 허공에 반쪽 생각을 띄운다

 

 


 

 

박수중 시인 / 물고기 귀로 듣다

 

 

 갈수록 난청이 진화하며

 세상의 소리들이

 물속에서 기어 나온다

 소리가 물의 떨림으로 나에게 도착한다

 물속을 유영하며

 달팽이관이 아닌 눈으로 피부로

 나는 온몸이 물고기의 귀가 된다

 

 미끈미끈 충만한 물의 흐름으로

 소리의 정서를 엿본다

 공기 진동의 소리들은 멀어지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흘러간 시간에 익숙한 소리들이

 먼 바다에서 찾아온다

 어디엔가 숨어 있던

 낯익은 호소呼訴들이다

 나와 인연 있던 미망未忘의 소리들이

 나에게 물보라처럼 속삭인다

 

 


 

 

박수중 시인 / 생각의 소리

 

 

귀가 어두워지며

실제實際의 소리가 멀어지자

머릿속으로 생각의 소리들이 다가온다

 

대화를 상대의 발성으로 듣기보다는

표정으로 감각으로 알아채려는데

추상抽象의 언어는 아직도 상상의 영역이다

 

내 귀에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으면서

청각이 아닌 시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니는

공상空想의 풍선들을 바라다본다

울긋불긋 상대의 마음 풍경을 헤아린다

 

다행히 그 옛날의 사람들과는

기억 속 귀퉁이에서

여전히 스스럼없이 속삭이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무슨 말인지 쉽게 들려온다

그것 모두 아마도 내 생각의 소리들일 것이기에.

 

-서울대법대문우회 『Fides』( Vol. 9) '피데스 시단'에서

 

 


 

 

박수중 시인 / L자 모양의 방

 

 

낡은 연립 꼭대기 짜투리층

L자 모양의

구부러진 방이 살고 있다

 

L의 세로 한 변은

아무것도 놓을 수 없는 좁고 긴 공간

끝에 바깥으로 닿아 있는 유일한 창은

굳게 닫혀 있다

그 사이 짙은 단절의 적막만이

부유하고 있다

 

L의 가로 또 한 변

안쪽 공간에는 나무 침대가 놓여 있고

이 밤의 주인과

바퀴벌레들이 자고 있다

오랜 시간 누구도 찾아온 흔적은 없다

 

고여 있던 방안의 시간도

서서이 구부러져

시린 과거의 기다림 속으로

역류하고 있다

 

 


 

박수중 시인

1944년 황해 연백 출신. 서울대 법학과 졸업.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한국문학인 상. 시집 <클라우드 방식으로> <박제> <크레바스> <볼레로> <꿈을 자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