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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여 시인 / 밤의 행정구역
하지만 내 오른손은 누군가의 왼손이 되었다
하천을 따라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림자 위에 얹어진 그림자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걷고 있던 오른쪽 둑길이 오른쪽 마을 행정 소속이 아니라고 너는 말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먼저 했다 낮의 그림자와 밤의 그림자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풍경은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계속 걸었고 걷다 보니 알 수 없게 걸음이 빨라졌다
밤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행정구역을 지워 나갔고 둑길도 지워지고 있어서 뒤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최은여 시인 / 유기농 좋아하세요?
종이 상자에 싸인 과자를 먹기 위해 비닐을 먼저 뜯지
목이 막혀 차를 우려내려면 비닐을 또 뜯어야 하지
오늘은 비닐을 몇 개나 뜯었니 네게서 비닐 냄새가 나
비닐 입구는 침을 살짝 묻혀야 열리지 키스할 때 꼭 네 입술처럼 말이야
비닐의 감각을 느껴 비닐의 성질을 배워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은 모두 비닐 속에 있었지
유기농 설탕과 유기농 우유와 유기농 달걀과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유기농 과자는 유기농 비닐에 들어 있지 않았어
가끔 파괴의 맛이 나
나를 다 담으려면 얼마나 큰 비닐이 필요할까 어떤 감정은 영원히 썩을 수 없어서 그때 나는 찢어지지가 않아
목구멍에서 부패의 냄새가 올라와 오늘의 재료가
안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어 대신, 나는 비닐처럼 가벼워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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