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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시인(의성) / 무게
소의 눈물이 보인다 그 속에서 함께 울어주는 나도 보인다
S자 갈고리에 걸린 주검이 있다 저 생은 왜 걸려 있을까
등짝에 붉은 혹은 푸른 도장이 찍혀 있다 일 등급 투 플러스를 찍었다고 가장 화려한 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목심 등심 채끝 양지 사태 우둔 설도 부위별 무게는 저울추에 달아 팔아야 하나
피어난 마블링 그 침묵의 덩어리를 떼어내어 저울 위에 올린다
몇 그램이 모자란다고 더 얹거나 몇 그램이 넘친다고 잘라낼 때마다 몇 그램의 죽음을 옮기게 된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속에 내 삶의 무게도 조금씩 섞어 파는 것을
주검의 무게를 잴 때마다 내 삶의 무게도 같이 잰다
아득한 소의 눈물을 생각한다 커다란 눈 속에 분홍 패랭이꽃이 피었다 지는
김미옥 시인(의성) / 만두 빚는 시인
만두를 빚으면서도 자꾸만 시를 생각해 목련이 지는 봄밤에도 모란이 겹겹이 피어나는 오월에 도 사나흘 내내 눈이 그치지 않는 정월에도
하얗게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앉아 만두피를 만들고 만 두소를 넣고 만두 귀를 접는 그때에도
때로 만두는 옆구리가 터지기도 하지 시의 옆구리는 터지지 않는 날이 없지
어쩌다 실수처럼 온전한 만두 하나쯤 만든다면 아, 그런 실수처럼 놀라운 시를 쓸 수 있다면
만두는 언제나 나를 눈멀게 하지 달도 넣고 봄빛도 넣고 묵은 슬픔도 다져 넣고 현기증 나도록 주물러야 하는 저녁
언제가는 쳐다도 안 볼 그깟 시처럼 만두 따윈 빚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느 바닷가에 앉아 흰 머리 흩날리며 해지는 것이나 한 스무 번 볼지도 모르지
만두를 찐다 저녁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고 한참이 지 났지만 만두 빚는 손을 멈출 수 없다
다시 솥 곁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김미옥 시인(의성) / 건조주의보
의사는 내 눈에 가뭄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페로제도의 안개 섬 바람 소리를 눈에 넣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횡단열차 덜컹거리는 소리가 눈에 밟혔다 북풍이 툴라의 자작나무에서 은빛을 털어내는 소리도 눈에 묻었다 눈에 밟혔다 하루에 다섯 번 들리던 이스탄불 '아잔'의 소리 눈에 고였다 티베트 고지에서 룽따가 오색으로 펄럭이는 소리 눈에 들었다 앙코르와트 통곡의 방에서 가슴 치는 소리 눈에 남겼다 호주머니에 손찔러 넣고 불던 그 휘파람 소리 무심결에 나오는 딸꾹질 소리까지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핏발선 눈, 압축한 소리들이 캄캄한 시간을 걸어가며 돌팔매질을 한다 눈에 버석거리는 눈물 한 방울 흘려 넣었다 눈을 깜박할 사이도 없이 가쁜 눈동자에 가뭄 심한 내 마음의 적막한 명치끝에
김미옥 시인(의성) / 씨감자를 심는다
웃자란 풀을 갈아엎고 감자를 심기 위해 이랑을 만든다 갓 말아놓은 김밥 같은 이랑에 검은 비닐을 씌우고 툭툭 구멍을 내 씨감자를 심는다 차르르르 씨감자를 덮는 흙의 소리 씨감자들이 흙을 덮고 속삭이고 이랑 사이로 씨앗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바람의 소맷부리가 땀방울을 거둬가고 새들은 쉴 새 없이 노래하고 진달래가 붉어 점점 부풀어가는 실한 열매는 흙이 좋아야 한다지만 씨가 더 좋아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흙 위의 소란도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싶은 봄도 오늘은 모두 나의 것
김미옥 시인(의성) / 모과처럼
어느 날 모과가 되기로 했지 거울 앞에서 매일매일 모과모과 하며 하하 호호 모과를 연습했지 눈초리가 올라가고 입꼬리가 올라갈 때까지 모과가 모과가 될 때까지 모과의 웃음이 될 때까지 모과를 닮아갔네 사람들은 내게서 모과 향이 난다네 나는 말할 수 없었지 연습만 모과라고 얼마나 많이 웃으면 이렇게 노란 웃음이 되겠니? 삐죽이며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모과! 하고 외쳐주지 가을바람에 모과가 익어가네 모과 향이 온몸을 감싸고도네 모과나무 아래서 오랜만에 나만의 웃음을 지어보네 풋!
김미옥 시인(의성) / 목련을 빚는 저녁
목련을 빚는 겨울이 있다
겨울은 모서리가 지워지고 찜 솥에는 활짝 핀 목련들이 가득 들어 있다
눈은 분분이 내려 꽃을 빚는 저녁
젖은 햇빛 몇 줌과 붉게 지는 노을과 칼칼한 저녁 냉기와 들락거리는 바람을 꾹꾹 눌러 넣고 한 장 한 장 꽃잎을 일으키면
눈송이가 눈사람이 되듯 만두가 목련이 되는 밤이 있다
어딘가에서 목련은 차가운 꽃망울의 잠을 견디고 있고
이 저녁, 만두는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당신이 모르는 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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