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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시인 / 이별의 도착
상대가 꺽어준 꽃을 시들 때까지 바라보고, 그 시든 꽃이 다시 피는 불가능한 소망을 품게 되는 이유는 첫사랑'사랑의 사건'으로만 간직하려는 심리 때문이다. 굳이 '첫'이라는 접두어가 붙는 이유는 그다음 사랑이 있다는 것이기에 첫사랑은 사랑이면서 동시에 이별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김경민 시인 / 관계는 공감으로부터
곁을 내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한다는 의미다. 옆은 이 심리작 공간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결은 '편'과도 다르다. 편에 붙은 특유의 배타심과 공격성이 없다. 내 편이 얼마나 되는 지 보다 내 곁에 누가 있는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김경민 시인 / 새벽편지
시계만이 오전을 살고 있는 새카만 시간 오늘도 스크린도어 앞에는 익숙한 낯선 얼굴들이 보입니다
한마디도 나눠 본 적 없지만 말보다 깊은 침묵으로 응원합니다 저마다 피어날 눈부신 하루를
김경민 시인 / 겨울, 시인의 노래
밤사이 세상이 탈탈 털렸다 미련이 쓸고 다니는 그의 이름은 쓸쓸한 계절 고독할 당신에게
당신은 젖줄을 끊음으로써 유기범이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엄연한 그들의 유린 지배 받은 삶이었다
시인의 시선이 환희를 관통하여 숙명을 보기까지 천만년 엉킨 머리칼은 백발이 되지 못한 채 숨죽여 울었다
어느 초목草木을 어느 고목古木, 枯木을 어느 비목碑木도 시인이 노래하기까지 당신은 의미를 갖지 못했다
겨울, 자연의 횡포를 피해 당신과 시인은 한 몸이 되어 뒤엉킨다 아홉의 구멍마다 서로의 뿌리가 뻗는다
김경민 시인 / 어두운 혼
나 네게 어제를 보여주어도 좋겠니 아니 그 어제의 어제 잠든 사람들의 창문과 낮은 세상의 둔덕아래 길게 누워있는 들판과 집 잃은 길들 발에 채이는 슬픈 기억들을 네게 보여주어도 좋겠니 가로등 젖은 그늘 속으로 나는 더 깊게 몸을 숨기고 내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무한천공 별 하나 세상 밖으로 사라질 때 그 별똥처럼 떨어져간 흔적없는 어제를 보여주어도 좋겠니 맨 땅에 누워 냉기에 몸을 적시며 구천(九泉)어딘가를 떠도는 전생의 혼을 불러 네게 말을 붙여도 좋겠니 두려워 말아라 익숙한 이 어둠에 나는 온 몸을 맡긴 채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과 함께 가라앉아 버리리니
김경민 시인 / 가을 부두
이제 항구에 부는 바람은 스산하다. 부두에 다다르기 전까지 도열하고 있던 나무들은 조금씩 제 옷들을 벗어던진다. 소금기에 절은 차가운 바람은 가로수 잎들을 물들이며 훑어내린다. 많은 사람들을 싣고 돌아오는, 가지런히 포개져 누워있는 원목들을 싣고 돌아오는, 수많은 컨테이너를 싣고 돌아오는, 그리고 알 수도 없는 많은 화물들을 싣고 돌아오는 저 배들은 어쩌면 오늘 아침 이 부두를 떠난 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 많은 배들이, 저 많은 각양각색의 화물을 적재한 배들이 마치 오랜 항해를 끝내고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항구는 어둠에 잠겨가고 반대로 불빛들은 더욱 휘황하다. 저 배에 실린 시간들은 알리라. 저를 실은 배가 닿는 섬이나 육지의 항구는 하나의 거대하고 밝은 무덤이라는 것을. 오랜 항해를 마친 배는 이 부두에 그토록 자신을 힘겹게 했던 시간이란 화물을 풀어놓을 것이다. 나도 이 가을 입구에, 아니면 몇 번의 가을을 더 지나 죽음의 항구에 다다를 때 어떤 시간의 화물을 풀어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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