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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건일 시인 / 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

김건일 시인 / 비

 

 

밤에 문득 잠이 깨었을 때

촉촉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누가 울고 있을까

 

꽃잎을 적시는 애틋한 마음

한량없는 자비

 

아무도 모르는 三更에

내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김건일 시인 / 개 이야기

 

 

그 개를 생각하니 미안하다

내 詩에 곧잘 등장하던

시골집의 그 개

 

가난하던 시골생활 십 수년 동안

해마다 두 배의 새끼를 낳아

조금은 생활에 보탬을 주던 그 개

 

논에 갈 때나 밭에 갈 때나

집을 지키라고 아무리 좇아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그 개

 

한번은 제 멋대로 새끼를 데리고

산에 마실을 갔다가

여우 잡는 올가미에 걸려

초주검이 되었던 그 개

 

서울로 이사올 때

그 개를 데려올 수 없었다

늙기도 늙었지만

자유롭게 뛰놀던 그 개를

모가지 묶어서

서울로 데려올 수 없었다

 

고향 시골집에서

처남과 같이 사는 그 개

서울에 눈오는 날

그 개가 보고 싶다

 

 


 

 

김건일 시인 / 달개비꽃

 

 

논에서

잡초로 뽑혀버리는

달개비꽃을

경동시장에서 보았다

 

머슴상에 말라붙은

보리밥풀 같은 남빛 달개비꽃

남빛의 달개비꽃이

경동시장에 약초로 팔려 와 있다

 

논을 맬 때

뽑아도 뽑아도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달게비꽃

 

뿌리 채 뽑혀 닭장 위에 널어

햇볕에 말려도

소나기 한 줄기만 맞으면

새파랗게 다시 살아나는 남빛 달개비꽃

 

-시집 <꽃의 곁에서> (2006년 우와)

 

 


 

 

김건일 시인 / 뜸북새는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도시의 뭇사람들 앞에서

뜸북새는 울지도 않았다

 

고향 논에서

점심나절과 저녁무렵을

뜸북 뜸북 울어

때를 알려주던 뜸북새가

 

때로

갓 심은 모를

엉망으로 밟아 농부의

애를 태우기도 하던 뜸북새

 

제기동 경동시장에

얼굴이 새카맣게 탄

농부에게 잡혀와

뜸북새는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도시의 뭇사람들 앞에서

뜸북새는 울지도 않고

고향의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김건일 시인 / 봄풀꽃

 

 

술을 먹으니

온몸이 쑤신다

 

시를 쓰니

온 영혼이 쑤신다

 

사랑을 하니

온몸과 영혼이 쑤신다 달뜬다

 

봄이 되니

지구의 구석구석이 쑤시고 달뜬다

 

양지 바른 언덕에는

노오란 풀꽃이 솟고

노란 나비가 날아오른다

 

 


 

 

김건일 시인 / 아버지의 이빨

 

 

무우 깍두기를 사각사각 씹던

그 좋던 아버지의 이빨

쌀밥도 오물오물 씹는

종이 이빨 되었네

 

자식이야 십 남매 낳았지만

자식이야 시집 장가 다 보냈지만

어느 자식 하나 아버지 사정 알지 못하네

맛 좋은 저녁 식탁 마련해놓고

제 새끼 쫑긋한 이빨 들여다보고

신기해서 신기해서 뽀뽀를 하네

 

한번쯤 고향에 찾아온다면

어릴 적 달빛이 사립문 열 듯

한번쯤 고향에 찾아온다면

아버지 사정 알 수 있으리오만

 

묻노라 남대문이 열려 있더뇨?

숭숭히 뚫린 아버지의 이빨 사이로

세찬 겨울 바람만 들랑거리네

 

 


 

김건일 시인 (1942~2020. 별세, 향년 79세)

1942년 경남 창원 출생. 건국대 국문과 졸업. 1974년 <시문학>에 <선인장> <부활> <생활> <선유도>로 추천완료. 시집 <풀꽃의 연가> <뜸북새는 울지도 않았다> <꿈의 대리 경작자> <꽃의 곁에서> 등. 2002년 서포<김만중문학상> 대상수상. 제23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