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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춘기 시인 / 빈집
당신은 감나무 아래 허리를 굽히는 중이에요 붉은 감이 봉긋한 입술을 부풀리고 있어요 뜨겁고 축축한 아궁이 앞에서 아이 넷을 낳은 당신 나무줄기에 붙은 유충들의 허물을 집어 올리는 당신 뒤꼍 대숲을 마당 안쪽으로 쓰러뜨리는, 저수지 물 밑에서 걸어와 양철 대문을 흔들고 도라지 꽃봉오리를 탁탁 터뜨리는 손끝에서
당신과 나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이 허리를 굽힌 감나무 아래 허공에 한 마리씩 매달려 있어요 고등어들 비리고 비린 고등어들 단단한 몸을 속구쳐서 허공에 매달린 고등어들, 똑똑 한 마리씩 따서 당신은 짚투성이 돼지들 앞에 풀어놓아요
우물처럼 지면 아래로 깊어져버린 빈집, 감나무 아래에 당신의 시간이 흠뻑 고였다가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과 나를 허공에 못 박았던 짙은 비린내,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은 이 집을 비운 채 물동이에 둥둥 뜬 감잎을 걷으시고 아이들이 모두 이 집을 더나고 이 집은 부엌에서 뜨거운 물이 끓고 검은 머리의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검은 머리의 당신이 이 집으로 들어오고 누군가 이 집의 지붕을 세우고 누군가 장지문을 삐그덕 열어젖히고 이 집의 빈 마당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잔뜩 구겨진 몸을 일으키는
-시집 『너는 레몬 나무처럼』실천문학사
노춘기 시인 / 버스를 타고 나에게로
그런 날,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너와 떨어져 앉아 한참을 말없이 가야만 했던 그런 날 가령 극장에 나란한 자리가 없어서 곁을 잃고 두 시간 동안 묵묵해져서 눈을 돌려 바라보면 너는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네가 이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내내 불안해져서 그런 날, 돌아오는 버스에 나란히 서 있을 자리도 없어서 너와 다른 쪽 창을 향한 손잡이를 붙들고 흔들려야 해서,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밀려 너에게서 한 발 더 멀어지고 아득히 물끄러미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빼곡한 옆얼굴들 사이 틈틈이 너무 멀어진 네 표정을 지켜보면서 알게 되었겠지 너도 나에게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걸 영원히 혼자 서 있게 된다는 사실을 문득 눈이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깊이 불안해져서 그런 날, 무슨 말인가를 들어야만 지나갈 수 있었던 그런 날 창밖에 정류장의 어둠을 우산으로 받으며 침울한 얼굴의 내가 서 있는 걸 목격하고 딛고 선 발밑을 잃어버릴 것처럼 단 한 번의 외면으로 모든 기억을 삭제당할 심판 앞에 선 것처럼 그런 날, 너와 나는 금이 간 흙벽을 맨몸으로 움켜쥔 폐가의 기둥 같아서 물끄러미 아득히 너에게서 너로부터
노춘기 시인 / 등 뒤의 당신
누군가 등 뒤에서 어깨를 감싸며 나를 그 품으로 끌어 당겼다
나비처럼 절뚝거리며, 깊고 뜨거운 어둠 속으로 나는 한참을 가라 앉았다
당신은 등 뒤의 세계 나는 눈을 감고 당신의 거대한 호흡 속에서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이 온기를 알고 있다 이 체취를 알고 있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심장이 쿵, 쿵쾅거렸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지만
솜이불을 휘감는 아이처럼 둥글게 만 품 속으로 온 몸을 감싼 등 뒤의 당신을 끌어 당겼다
한 번 더 내 이름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양 손에 당신의 기척을 붙들고 한 밤을 흔들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노춘기 시인 / 빈집
당신은 감나무 아래 허리를 굽히는 중이에요 붉은 감이 봉긋한 입술을 부풀리고 있어요 뜨겁고 축축한 아궁이 앞에서 아이 넷을 낳은 당신 나무줄기에 붙은 유충들의 허물을 집어 올리는 당신 뒤꼍 대숲을 마당 안쪽으로 쓰러뜨리는, 저수지 물 밑에서 걸어와 양철 대문을 흔들고 도라지 꽃봉오리를 탁탁 터뜨리는 손끝에서
당신과 나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이 허리를 굽힌 감나무 아래 허공에 한 마리씩 매달려 있어요 고등어들 비리고 비린 고등어들 단단한 몸을 속구쳐서 허공에 매달린 고등어들, 똑똑 한 마리씩 따서 당신은 짚투성이 돼지들 앞에 풀어놓아요
우물처럼 지면 아래로 깊어져버린 빈집, 감나무 아래에 당신의 시간이 흠뻑 고였다가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과 나를 허공에 못 박았던 짙은 비린내,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은 이 집을 비운 채 물동이에 둥둥 뜬 감잎을 걷으시고 아이들이 모두 이 집을 더나고 이 집은 부엌에서 뜨거운 물이 끓고 검은 머리의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검은 머리의 당신이 이 집으로 들어오고 누군가 이 집의 지붕을 세우고 누군가 장지문을 삐그덕 열어젖히고 이 집의 빈 마당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잔뜩 구겨진 몸을 일으키는
-시집 <너는 레몬 나무처럼>에서
노춘기 시인 / 이 별에서의 오르페우스
죽은 사람에겐 무엇보다 꽃이 필요해요 오르페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나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가고 누구나 즐겁게 다시 육신의 길로 갈 수 없나요
이 별에서,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라, 그들은 힘들게 죽는다 힘들게, 마지못해서
얼마나 많은 시체가 매장되지 못한 채 저 들판에 널려 있는지 단 한 송이의 꽃도 남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생각에 잠겨 들판을 가로질렀다 저편 노을 아래로 화염에 휩싸인 큰 도시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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