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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 시인 / 종이인간
네가 떠난 후 나를 구겨서 버렸어 빈터에 날아다니는 종이처럼 안경과 포크도 없이 고지서가 우체통에 쌓이는 동안 밤이 다가오는 도시 뒷골목을 혼자서 걸었지 마스크 쓴 사람들은 지하철역 출구로 쏟아져 나오고 누군가가 후투티 새를 말했어 어쩐지 아프리카 바람이 부는 것 같고 예니세이 강가에 쓰던 이름들이 기억나고 내 안에 불온한 책들을 쑤셔 넣다가 고개를 돌리면 빌딩 전광판에 인간이 인간을 못살게 구는 사건들 속에서 거짓말이 태연하게 진실 같은 뉴스로 빛나고 편의점 모퉁이에서는 카프카가 나를 부르고 바퀴벌레처럼 납작 엎드리다가 보도블록과 맨홀 사이에서 누군가가 내 발목을 잡았는데 벌레가 된 줄 알았던 내 몸에서 무엇인가 뭉치고 일어서는 느낌 보푸라기 마음은 가라앉는 방식을 모르지 천사의 마음을 훔쳐서 너에게 던져봤지만 구겨진 몸통은 펴지질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윗몸일으키기 하는 기분으로 몸을 접었다 펴고 접었다 펴면서 곰곰이 생각해 종잇장처럼 납작했던 너의 마지막 모습을 한낱 종이 한 장 차이로 존재하는 누군가 가위로 도려내기 전까지 죽을 수도 없는 나는 종이인간
조희 시인 / 파울라*가 있는 연못 풍경
잉어떼가 연못 둘레를 그려요
잔잔히 일어나는 파문, 연못 속 덤불로 내려가는 수초 사이에 파울라가 있어요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미소 짓는 그녀, 꿈밖으로 자란 머리칼을 곱게 빗어 뒤로 묶었어요 손에는 꽃을 들고서
그녀는 아프리카 나무인형처럼 연못의 둥근 무릎을 껴안았어요 연못은 모서리가 닳은 달을 낳았고 피가 도는 돌을 낳았고 빛나는 거울을 낳았고 우리가 우리를 모를 때
가라앉은 산을 배경으로 그녀가 수면으로 떠올랐어요
그녀의 이마에 구름이 앉았다 흘러가요 바람이 그녀의 숨결을 읽어요 눈, 코, 입, 불룩한 배 물의 맥박은 빠르게 물결치고
그녀 옆에 어린 나를 팔에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도 나타났어요 우리는 모두 누드, 윤곽이 둥글고 굵은 원시인처럼 연못에 누워 있어요
파울라와 엄마에게는 커다란 유방과 불룩불룩한 엉덩이가 있어요 연못은 자궁처럼 깊고 물렁물렁해요 수초는 손바닥으로 물결을 뒤척이고
나는 연못에 파울라와 어린 나와 엄마를 두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신발에 연못이 묻어 왔어요 자고 나면 물이 찰랑거렸죠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연못, 상상이 상상을 낳고 있어요 가끔 물속에서 내가 쏟아져요
눈꺼풀에 붙은 지느러미의 시간이 안과 밖으로 흐르고
나는 연못의 굵은 허벅지를 베고 잠이 들어요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1907),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조희 시인 / 샤갈과 눈길을 걷는 동안
자작나무 몇 그루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눈길을 걷는 동안 발자국이 그림자 없이 제 무게만큼 찍으면서 따라왔다 초록얼굴의 남자가 나무 사이로 가끔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무껍질에 씌워진 글귀가 씹혔다 발목 잘린 선율이 숲속으로 불어왔다 눈이 나뭇가지에 쌓이는 것을 바라보며 샤갈이 말했다 눈은 사랑의 비늘이야
샤갈이 흰색 코트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어 하늘로 던졌다 동전이 눈 위에 떨어졌고 초록얼굴의 남자가 얼굴과 뒤통수를 보이며 동전 속에 있었다
샤갈은 동전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샤갈의 머리 위로 염소가 날아다니거나 수탉이 거꾸로 서 있기도 했다 샤갈의 눈동자에 눈이 내렸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눈이 그쳤다 뒤꿈치가 화끈거렸다 자작나무 몇 그루를 삼켰을 뿐인데 입술 사이로 자작자작 불꽃이 튀었다
샤갈이 가까이 다가섰다 내 입술을 열고 울음을 꺼냈다 새갈의 손에는 검은 숯이 있었다 어디선가 동전이 쨍그랑 떨어졌다 초록얼굴의 남자가 동전 속에서 일어섰다 첫 문장이 지워졌다
-계간 『애지』 2023년 봄호 발표
조희 시인 / 양파
도마 위에 흰 양파를 썬다 비스듬히 눕혀지는 동그라미들
확 퍼지는 매운 냄새, 양파 속에서 어떤 울음이 새나왔고 오른손으로 두 눈을 훔쳤다 양파는 아주 작은 점에서 태어났어, 네가 말했다
점이라는 말이 섬으로 들렸다 감정이 보글거리는 프라이팬에서 삼겹살을 뒤집으며 양파를 고기 옆에 올려놓았다 소금을 뿌리자 몇 개의 알갱이가 레코드판 튀는 소리를 냈다 양파조각이 젓가락에서 낮달처럼 미끄러졌다
냉장고에 저장해 둔 슬픔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너와 식탁에 마주앉았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도래한다는 것은 달콤하지 않습니까? 육즙이 고인 삼겹살을 집어 먹으며 네가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상추에 고기와 양파를 싸먹으며 깊은 대화라고 생각했다
문득 천정에서 내려온 거미가 우리를 보고 웃었다 긴 다리로 입을 막으며 분명히 웃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거미줄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다 세상이 코미디도 아닌데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휴지로 거미를 꾸욱 눌러서 버렸다 어쩌면 오해는 거미 항문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라 상상했다
우리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했다 트림을 하면 양파 냄새가 났고 히히힝 당나귀 울음소리가 솟구쳤다 우리가 점점 점이 돼 가는 거 맞지?
양파는 벗겨도 벗겨도 양파인데 우리는 우리를 벗겨도 우리를 모르고 누가 벗기는지도 모르고
양파 속에는 흰 당나귀가 산다 양파를 까도 까도 흰 당나귀가 산다
조희 시인 / 어떤 부품을 위한 선 또는 어떤 선을 위한 부품
위에서 아래로 공간을 찢는 소리 툭! 울림의 최선 한 장의 낙엽
추락한 부품의 증언일까요 선홍빛 피의 무게는 앞뒤를 알아볼 수가 없어요
어떤 부품을 위한 선, 닉네임은 바닥이라고
본 적 없는 부품이 중얼거리며 왼쪽 주머니에 있는 세 개의 돌멩이를 바닥에 내려놓아요
바닥에서 바라보는 공사현장의 타워크레인은 돌멩이들의 이방인 바닥에서 바라보아야만 깨달을 수 있는 시선 그것은 낙엽의 힘 무릎 성장통에 부대끼다 추락사한 사건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경찰 부품들은 사건현장에 노란 테이프로 줄을 치고 오른쪽 눈에 돋보기를 갖다 대요
도대체 성장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경찰 부품들이 세 개의 돌멩이를 들고 뒤돌아서요 나는 돌의 중력이 사라질까봐 동전을 높이 던져요 동전은 쨍그랑 증언해요
타워크레인이 없으면 무거운 물건들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요 어떤 부품들은 말썽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낙엽처럼 굴러요
식물들은 바닥의 빈틈에서 나사를 조이고 새들은 나뭇가지 빈틈에 둥지를 틀고 붉은 동백꽃은 꽃의 빈틈에서 모가지째 해체되었다가 겨울에 다시 조립되겠죠
마스크를 콧등 위로 아무리 꾹 눌러 써도 코로 스며드는 바이러스를 침묵이라고 해석하는 부품도 있죠
오래된 부품들은 병원에서 녹을 제거해요 사랑에 빠진 부품들은 수리공에게 미래의 상품을 선물 받아요 나는 나에게 주는 특별한 부품을 주문했어요 납작한 자세로
문 밖에 도착한 천사에게 스스로 배 속 깊이 당신도 주문했나요?
어떤 불멸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품들에게 열려 있는 문 어떤 낙엽을 위한 앰뷸런스가 배경이던 노란 은행나무 길을 끌고 에고에고 떠나가요 웅성거리던 부품들은 천천히 흩어져요 나는 죽은 부품
내 앞에 비碑를 세우지 마세요
조희 시인 / 어떤 가을
나는 망했다 내려가면 갈수록 옷을 하나씩 벗어야 했다 버버리를 벗었다 창밖의 나무들이 잎사귀를 하나씩 떨어뜨리듯 기차는 남쪽으로 자꾸만 달렸다
바람은 당신의 틀니 사이로 불어왔다 양파 껍질 벗기듯 기억을 한 겹씩 벗겼고 나는 조금 더 얼굴이 붉어져 스카프를 벗었고 은행나무는 스웨터를 벗었다
옆자리 늙은 여자에게서 묵은김치 냄새가 났다 목포로 가는 길, 삼겹살과 삭힌 홍어가 한 접시에 담긴 식탁풍경에 대해 말했다 기차가 나른해졌다 그녀는 볼이 붉어져 자켓을 벗고 조끼도 벗었다 남쪽 바다를 보면 모로 누워 자는 습관이 고쳐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통로 건너편 아가씨는 낮은 담장 아래 빨간 맨드라미 꽃밭을 얘기했다 이제 볼 수 없는 할머니 꽃밭, 그녀 입술이 닭의 볏처럼 붉어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듯했다 맨드라미처럼 어긋났던 시간을 떠올린 걸까
나는 한낮에 꾸는 꿈처럼 그들을 기차에 두고 내렸다 당신을 요양병원에 내려두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 같아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국도를 달리는 시외버스로 갈아탔다 창밖으로 금강이 기차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강변의 단풍나무처럼 후끈해져 나를 벗어버렸다 내가 흐르는 것 같았다 강물도 알몸이었다 올라갈 때 입을 옷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망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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