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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현 시인 / 담쟁이
가을이 상강의 하얀 이불을 덮고 담벼락 햇살 그림자 늘려 가면 물관을 비워야 하는 얼마간의 시간
조금 더 높이 손 뻗은 자세 그대로 삼동三冬 긴 잠에 빠질 때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저것
다시 봄 오고 담벼락에 햇살 왕성할 때 새로 피어나는 이파리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라고 저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쉴 줄 몰라 검버섯 가득 피어나고 무엇 하나 비우지도 못한 채, 긴 세월 살도록 아등바등 햇살 아래로 밀어 올리려는 천형
가을의 끄트머리는 왜 슬픈 것인지 겨울이 지나며 잊어버리고 말 짧은 시선이 서럽다
황윤현 시인 / 곤지곤지 죔죔
칠 개월 박이 아가 중환자실 증조 할미 면회 왔네 재롱에 재미 들려 곤지곤지 죔죔
귀엽다, 귀엽다 하시더니 흰 망사 고깔 쓰고 주무시기만 하네
엄니, 그만 일어나셔요 언제 아팠냐는 듯 눈 반짝 뜨고 깨어나는 겁니다
절 따라 해 보셔요 귀여운 아가처럼 곤지곤지 죔죔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곤지곤지 죔죔
곤지곤지 죔죔
황윤현 시인 / 리허설
날 닮은 얼굴이 빛을 끌어안고 마주 선다
불안정한 침묵을 깨고 바라던 마음 끌어내어 간신히 입을 연다
불규칙한 바이브레이션은 어머니 칠순 잔치 사회자의 매끄러운 말이 되어 눈으로 들어오고 과장된 제스츄어는 그에게서 담백해진다
그는 빛의 관통을 허락하지 않는 거울의 분신
나는 그이길 바라지만 그는 내가 될 수 없다
벌써 몇 번째였던가 뿌옇게 흐려지는 그를 본 것이 어깨를 도닥이는 아버지의 손이 남모르게 내쉬는 어머니의 한숨이
이번만큼은 선택의 심볼로 이 양복 깃을 꿰뚫어야 한다 '잘했어, 해낸 거야' 그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싶다
넥타이를 매만지는 그의 손등에 돋은 파르스름한 긴장
기대해도 좋아, 나의 화려한 업셋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황윤현 시인 / 안팎의 우주
우리는 평행 우주를 살아간다
빛의 파동과 입자의 관계처럼 초공간은 내 안에도 존재하는 것이어서 생각의 파동이 말이 되는 순간 말은 또 다른 파동이 되어 생각을 만들어가는 확장이 끝없이 일어난다
이미지 하나에서 시작된 빅뱅
내가시를쓰고같은내가시를쓰고또같은내가시 를쓰는평행우주에서나는저마다다른시를쓴다
이미지는 하나지만 한 뿌리에서 자란 가지가 펼쳐져 잎이 달리고, 잭의 콩나무처럼 자라고 자라 구름 나라 도깨비의 보물 창고를 털라 한다
내 시를 악평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다른 우주에서 난 다른 시를 쓸 것이고 호평을 받을 수도 있는 거니까 당신이 나와 같은 시를 쓰고 내가 악평할 수도 있는 거니까
당신과 나는 수없이 존재한다
무한대의 공간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유한하고 경우의 수가 바닥나면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뜬금없는 데자뷰는 평행 우주의 미세한 틈새를 비집고 내게 전해진 n 차원의 텔레파시
지금의 나는 감정을 쓰고 지금의 나는 감각을 쓴다 지금의 나는 관념 투성이고 지금의 나는 담백하다 어느 우주에선가 잡문을 쓰고 어느 우주에서는 불후의 시 한 편을 탈고한다
수많은 시가 나를 쓴다
* 우주가 정말 무한히 크다면, 원자와 분자의 한정적인 배열은 어쩔 수 없이 반복되면서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평행 우주 이론의 한 가지 가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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