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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채율 시인 / 시 값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

이채율 시인 / 시 값

십이 월 어스름께 소주방

노시인 앞에 푸른 이슬 한 병 놓았다

시는 어찌 쓰는 겁니까

울며불며 쓰는 거다

수족관서 시어가 되길 기다리던 꺼무룩한 우럭이

탕으로 나오고

그건 또 어떤 겁니까 감이 안 옵니다

시가 안 될 때는 죽으라 매달려도 안 된다

오십 년 썼는데일 년에 한 편도 안 될 때 있다

될 때는 마누라 젖고름 풀다가 생각나서 쓰는 게, 시다

또, 이슬이 한 병 더 내리고

저는 재간이 있겠습니까

마이 쓰라 쓰다 보면 게 중에 나온다

아무나 다 쓴다꼬 되는 게, 시면

개나 소나 다 쓰구로

글쟁이가 힘들지마는, 시는 게 중에 제일 힘든 기라

그라고 니는 시 바람 들었으니

아예 시 애인하고 바람 나뿌라,그라믄 마 시가 된다

오늘 대화 값은 시로 치면 얼마나 될까요

나는 마 소주 한 병이 시값 인기라

그만큼 글값이 싸 진기라

그런데도 시인 되겠다는 사람은 와 이래 많노

밤새도록 푸른 이슬 시 한 편 내린다

 

 


 

이채율 시인 / 천국으로 택배

 

 

 물류 센터가 토한 택배 배송은 승강기 없는 건물을 하루 수십 번, 주인 없는 집을 다시 서너 번 방문 하고 닳은 어깨 무너질 즈음 파손된 물건보상 하라는 고객 성화로 막을 내린다.

 

 포장마차 구석에 앉아서야 운동화 밑창도 숨을 돌리는데 소주병에 비친 푸르데데한 건 산 얼굴인지 죽은 얼굴인지 얼굴이 비치고 순대를 삼키는 목구멍엔 오 년간 산소마스크를 낀 채 반신불수로 입원한 아내 병원비 명세서가 가시처럼 걸린다.

 

​ 아내 죽은 지 삼 년 된 누룩 냄새 동료는 이제 그만큼 했으니 마음 내려놓으라며 푹 익은 술지게미 말투 어물거리는데 크레졸 냄새 짙은 목소리 간호사 전화 천국으로 날라야 하는 배송물

 

 주름치마처럼 칸칸이 절개된 아내와 시간이 방향지시등처럼 깜빡일 때 무광택 울음으로, 배송용 박스에 손 떨려 서툴게 수신인 없는 스티커를 붙인다. 고된 길 이리 돌아서 왔으니 하늘도 쉬 문을 열어 줄 거야, 택뱁니다

 

 


 

 

이채율 시인 / 불매가

 

 자는가, 방금 언양 실비서 한잔했는데 울화가 치밀어 전화하네, 쇠부리 사십 년 쇳물 녹인 돈을 그 여자 구멍에 엄청시리 갖다 부었지, 그랬더니 언양 댁 아랫도리 불두덩은 부풂하고 속은 용광로처럼 더 깊고 더 뜨거워지더니만, 근디 대번에 용광로보다 떼불*은 여자 궁은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더라 말일세, 다달이 행사가 웬 게 그리 많은가, 모친 장모 마누라 애인 애인장모 여자 다섯 관리 했더니 통장이 말라버리데, 그래도 막걸리에 두부김치 한 점 먹이고 코맹맹이로 요사스럽게 오라버니카는데 오금 저렸구먼, 그카고 여성 상위시대라며 근자 섶쇠인 내 쇳덩이 쉼 없이 메질 담금질해 강쇠로 불매 불매하는데, 고 년 뇌는 혀에 달렸는지 색 풀무질 입이 잠시도 가만 안 있더니만, 그려서 뇌가 사타구니에 달린 난 본능에 충실했구먼, 계산대 돈 받는 젊은 놈을 일전엔 친정 오래비라카더니, 오늘에사 그놈이 애인이라카네 허 허 고 깜찍한 년 얼측이 없네, 어문소리 그만하라고, 알았네, 그러믄 담에 한잔하세 그만 주무시게

*떼불다: burning hot

-무크 『남부문학』 2024년 발표

 

 


 

 

이채율 시인 / 닭 파는 노인

 새벽부터 닭 열댓 마리 경운기에 싣고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오일장 생선 좌판 비린내며 그릇가게 달그락거림이며 국밥집 선지 냄새 지천 사이로 가두리 그물치고 품에 걸 풀어놓는다 일찌감치 자리 잡은 가을 모종 장사꾼 옆에 슬그머니 눈칠 보며

 암탉은 눈꺼풀 껌뻑껌뻑하고 또 다른 몇 마리는 지나는 사람 발뒤꿈치를 쪼아댄다 점심때까지 팔려나가는 놈은 없고 쌀장사 구 씨와 먹은 돼지국밥 새우젓이 짰던지 물은 자꾸 당기는데 자릴 뜨질 못한다 이틀 후 말복이라 장꾼만 많고 드문드문 객꾼은 눈길조차 좀체 없어

 파장하면 실비집 들르지 말고 곧장 오라며 신신당부하던 할멈 잔소리 대낮에 닭 홰치듯 울린다 아들은 객지 공사장 가고 혼자 몸 푼 며느리 미역이며 고등어자반 복합비료도 사야 하는데 이놈의 날 파리는 왜 이리 날아드는지

 꼬박꼬박 조는 수탉은 복달임하고 남은 달걀 한 꾸러미는 멸치와 맞바꿔볼까 아직 남은 암탉과 오골계는 또 어쩔까 맞은 편 채소 약초 두부 장사 파장 준비하는데 해는 뉘엿뉘엿 마무리하는 보따리들 속으로 잠기고 턱 괴고 쪼그려 애꿎은 돗대 담배만 잘근잘근

​-무크 『경희사이버문학』 제22호 2024년 발표

 

 


 

 

이채율 시인 / 허들링

 

여긴 눈사람이 모여드는 눈밭이에요.

콩물 덩얼덩얼한 목소리 두부할매 곁으로

건어물아재 머리를 주억거리며 걸어오네요.

그 옆 코다리삼촌 안짱걸음으로 다가옵니다.

만푸장 국수아지매와 61번 노점상 엄마도 모여서요.

우리는 겨울을 받아 안으며 어깨가 둥글어져요.

둥글게둥글게 눈을 굴리며

시장 골목에서 눈사람이 되어요.

작은 어깰 더 작게 오므리고

시멘트 장바닥에 새벽처럼 쪼그려 앉아요.

한데 붙으려는 건 서로에게 녹아들려는 것이죠.

녹아드는 건 눈사람의 으뜸가는 수완이잖아요.

극지란 시린 사람이 사는 오지여서

서로를 끌어안으면 가슴과 가슴은 따뜻해집니다.

졸린 눈을 털외투에 감추며

저마다 손난로 하나씩 호주머니에 넣고

신경통 쑤시던 간밤의 안부를 난전으로 펼쳐놓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어쩌면 북극이 아닌 남극을 생각하죠.

빙하의 좌판 골목에

드문드문 유빙이 떠내려오면

언 살에 박힌 젖은 입술도 잠시 따뜻해집니다.

싸락눈만 한 마수걸이 흥정에 바구니 속 비닐봉지가

제비갈매기 부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눈썹엔 흰 눈발이 달라붙어요.

물건값 후려치는 뜨내기 어깃장

얼음 벼랑까지 내쫓기도 하지만

시도 때도 없는 마트 할인행사에는

하루치 추위가 서너 곱절로 세차게 몰려옵니다.

내일이 된다는 건 언 발 위에 언 발을 얹는 일입니다.

눈발은 아까보다 거세지고

손난로는 어느새 얼음처럼 차가워졌지만

어쩌겠어요, 파장이 될 때까진

어떡하든 견뎌내야 하는 아득한 설원인걸요.

조금씩 앉은 자리를 좁히는

눈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오늘은 따뜻한 설국 하나 태어납니다

​-일간 『투데이』 2024년 신문 발표

 


 

이채율 시인

2016년 《울산문학〉으로 등단. 본명: 이정애.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24년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당선. 2019년 울산詩문학상 작품상; 2024년 울주이바구 공모전 최우수상. 2024년 이은방문학상 장려상 수상. 울산시인협회 회원, 모던포엠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