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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미경 시인 / 거미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1.

박미경 시인 / 거미줄

 

 

추적거리던 비 그치고

바람이나 쳐주려 창고 문을 열었다

거미가 여기저기 그물을 쳐 놓았다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도망치던 귀뚜라미가 묶인다

 

내 탓이다 싶어, 풀어주는데

옆에 있던 옆집 아저씨 한마디 한다

와 그걸 풀어 주노!

그놈도 묵고 살아야 할 거 아이가

 

쥐새끼 한 마리 못 빠져 나가게 왜

거미는 창고 문을 지키고 있었을까

 

귀뚜라미는 내 손에 다리 하나

떼어놓고 간 곳 없다

부러진 다리 그물에 던져줘야 하나

혼비백산 달아난 놈 찾아줘야 하나

 

댓새 내린 가을비에 푹 젖어버렸는지

꽁꽁 거미줄에 묶인 생각이

옴짝달싹 못한다

 

 


 

 

박미경 시인 / 축축하다

 

 

산골의 오후는 짧았다

봉화산 너머 해 지면 정숙이네 집에

우르르 시시덕거렸다

늦도록 호롱불에 콧구멍 그을렸다

 

호랭이가 업어간대도

새벽같이 일어나 본 적 없던 나, 웬일로

그날은 꼭두새벽 잠깼다 방바닥이 축축했다

 

짓궂은 옥자가 몰래 물을 부었나,

정숙이 엄마 무서워

설마 이불에 물 부어 골탕 먹일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 누가 깰세라 꼼짝하지 못했다

손부채질에 털고 비비고

쥐도 새도 모르게 옷이며 이불을

말리는 시간은 길고 길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온 정숙이네 집

한동안 발 끊었던가,

 

막걸리 몇 잔에, 사십 년 전 까마득히 돌아가니

치마 아닌 눈가가 축축하다

 

 


 

 

박미경 시인 / 방향을 틀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이었다

겹겹의 후회를 쏟아내느라

역겨운 밤이 길었다

 

검은 줄이 꿈틀댄다

꼴리는대로 살아지지 않았던 어제가

꺾인 창자를 통과하며 신음소리를 낸다

힘을 빼라는 호통에

숨겨야 할 속사정 속속들이 들키며

태아처럼 웅크리고 공포를 견딘다

 

직진할 수 없었던 배배 꼬인 세상

방향을 틀어본 자들의 자조 섞인 농담일까

순대를 죽으로 채우면 힘을 못 쓴다며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이

오거리 순댓국집으로 사라진다

 

홀로 남아 죽을 먹는다

순대를 채운다는 말 잘못 삼켰는지

휘어진 길이 부글거린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박미경 시인

2017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시집 『동천의 낯선 섬」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