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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경 시인 / 거미줄
추적거리던 비 그치고 바람이나 쳐주려 창고 문을 열었다 거미가 여기저기 그물을 쳐 놓았다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도망치던 귀뚜라미가 묶인다
내 탓이다 싶어, 풀어주는데 옆에 있던 옆집 아저씨 한마디 한다 와 그걸 풀어 주노! 그놈도 묵고 살아야 할 거 아이가
쥐새끼 한 마리 못 빠져 나가게 왜 거미는 창고 문을 지키고 있었을까
귀뚜라미는 내 손에 다리 하나 떼어놓고 간 곳 없다 부러진 다리 그물에 던져줘야 하나 혼비백산 달아난 놈 찾아줘야 하나
댓새 내린 가을비에 푹 젖어버렸는지 꽁꽁 거미줄에 묶인 생각이 옴짝달싹 못한다
박미경 시인 / 축축하다
산골의 오후는 짧았다 봉화산 너머 해 지면 정숙이네 집에 우르르 시시덕거렸다 늦도록 호롱불에 콧구멍 그을렸다
호랭이가 업어간대도 새벽같이 일어나 본 적 없던 나, 웬일로 그날은 꼭두새벽 잠깼다 방바닥이 축축했다
짓궂은 옥자가 몰래 물을 부었나, 정숙이 엄마 무서워 설마 이불에 물 부어 골탕 먹일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 누가 깰세라 꼼짝하지 못했다 손부채질에 털고 비비고 쥐도 새도 모르게 옷이며 이불을 말리는 시간은 길고 길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온 정숙이네 집 한동안 발 끊었던가,
막걸리 몇 잔에, 사십 년 전 까마득히 돌아가니 치마 아닌 눈가가 축축하다
박미경 시인 / 방향을 틀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이었다 겹겹의 후회를 쏟아내느라 역겨운 밤이 길었다
검은 줄이 꿈틀댄다 꼴리는대로 살아지지 않았던 어제가 꺾인 창자를 통과하며 신음소리를 낸다 힘을 빼라는 호통에 숨겨야 할 속사정 속속들이 들키며 태아처럼 웅크리고 공포를 견딘다
직진할 수 없었던 배배 꼬인 세상 방향을 틀어본 자들의 자조 섞인 농담일까 순대를 죽으로 채우면 힘을 못 쓴다며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이 오거리 순댓국집으로 사라진다
홀로 남아 죽을 먹는다 순대를 채운다는 말 잘못 삼켰는지 휘어진 길이 부글거린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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