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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원규 시인 / 족필(足筆)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1.

이원규 시인 / 족필(足筆)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이원규 시인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이원규 시인 / 낙화유수

 

 

이리 쉬 질걸

화르르 서둘러 피었나

 

꽃 속에 이미

남 몰래 씨눈 틔운

정녕 보지 말아야 할 얼굴이었나

 

공중에 찍힌 새들의 발자국

내 얼굴의 낙화유수여

 

 


 

 

이원규 시인 / 당신이 죽을 때

 

 

나 없이 당신이 죽을 때

하필이면 그 순간에

서망 비애의 바닷가를 어슬렁거리거나

지리산 길벗들과 술추렴하거나

딴 여자 생각하며 키득거릴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당신이 먼저 죽을 때

첫날밤처럼 나란히 누워

거친 숨결이 낙엽처럼 다 식을 때까지

부고도 없이 둘만의 아침이 올 때까지

당신의 차고도 낯선 왼손을 놓지 않겠지만

 

행여 내가 먼저 죽을 때

당신은 섬진강 윤슬을 무연히 바라보거나

벚나무 아래 꽃잎 하나 스치듯

지난 생 남은 생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앞머리 쓸어 넘기며 힐끗 돌아보기를

 

내가 죽고 당신이 살아 꽃은 피고

당신이 죽고 내가 살아 꽃이 지느니

 

 


 

 

이원규 시인 / 獨居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쁘게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있을 때

나는 일없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시집 <옛 애인의 집』, 솔 2003

 

 


 

 

이원규 시인 / 겁나게와 잉 사이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시집 『옛 애인의 집』, 솔 2003

 

 


 

이원규 시인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계명대 경제학과 졸업.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1989년 <실천문학>에 연작시 “빨치산 아내의 편지‘ 15편을 발표하며 활동 시작. 시집 『빨치산의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시사진집 『달빛을 깨물다』 등. 포토에세이 『나는 지리산에 산다』 등. 2021년 제16회 신동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