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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홍 시인 / 소나무(고집)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

김기홍 시인 / 소나무(고집)

 

 

세월은 와서 갔으나

가서 또 왔으나

그냥 그럭저럭 이다

 

비는 억수로 쏟아졌으나

눈은 폭설로 쌓였으나

그친 뒤 마르고 쌓였다가 녹아도

그저 푸르다

 

울긋불긋

화려한 색의 가을 노래에

침묵으로 버티어서

산천에 듬성듬성 놓여 불을 끈다

 

해동 되는 공기의 반가움으로

나목은 새순으로 속삭이며

꽃잎의 축제를 즐겨도

묵묵히 산야에 송홧가루만 뿌린다

 

세월도 화려함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으니

저런 푸른 절개만 있다면

아집이 되어도 지킬만하다

 

 


 

 

김기홍 시인 / 살 만큼 살아보니

 

 

나는 사랑받을 이유를

몇 개나 갖고서 살아왔을까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조건을

얼마만큼 많이 다양하게 지니고 살아왔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나 있었을까

 

이런들 한세상 저런들 한세상

이왕 이라서 미움받을 행동보다는

사랑받을 행동을 하면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아졌을까

 

돈이 많아서 사랑을 받았을까

권력이 있어서 사랑을 받았을까

명예가 따라서 사랑을 받았을까

 

사람들은 모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사랑스러움이

그 사람의 품격인 것을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하지만 말고 사랑받을 이유를

많이 갖고서 한세상 엮어나 볼 수 있었다면

 

언제나 마음은 자유로워졌으니

늙은 인생은 육신의 괴로움 때문에

영혼이 불쌍할 일은 아니라 하여보겠네

 

 


 

 

김기홍 시인 / 가연

 

 

높고 높아서 숨이 가파른 산이

세월에 그 모습 변하고 싶어

나무를 가꾼다

빗물에 씻기어 내리는 흙이 아까워 이름 없는 풀도 키운다

가끔 거기에 바위가 얹혀있으면

키 높이에 실패하여  

삶은 무의미에 젖어들겠다

또 한

계절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어

그런 돌덩이는 별로 달갑지 않아

마치

사람이 서로 만나 부대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음이

어느 날 갑자기

변화하는 산은 기대할 수 없는 일

우뚝 솟은 산이 속을 내어 주고서

묵직

하니 버틸 수 있음이

흙 속에 생명의 뿌리 때문이며

그 인연으로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 나무가 있어

산은 변화를 얻고 있음이

사람이 산이라면

또 한 사람이 나무가 되어야 하겠지

 

 


 

 

김기홍 시인 / 비움보다는 덜 가지려는 마음

 

 

겨울이 여전히 버티는 들녘

봄 마중이라며 설치는 매화나무

하얀 꽃잎 순백의 고백

길가에 벚나무는 봄의 눈치 살피다가

피어나고 있는 날

그 봄날 완연히 맛보지 않고서도

꽃잎 지우고 새순 돋는다

 

그런 날 같은 인생은 찬바람 맞아

계속 소유한 수입 뚝뚝 떨어질 때

매화나무 겉모습 바라다본다

 

화사하니 핀 꽃잎 봄 보자마자

웃음 지우고는 꿋꿋하게

새싹 다듬는 마른 나뭇가지의

도도한 여유

 

그러려는 삶

매실 이름 구실 하려고

찬 바람으로 꽃잎 피우다

온후한 봄날은 새싹에 바치니

더운 날 결실은 독특하니 향기 피운다

 

그러려는 삶

꽃잎 지고 나도 또 봄 기다리는

무던한 삶을 살아내야지

비록 인생엔 계절이 없지만

가졌다가 가질 수 없음에

더 가지려는 아쉬움으로

인생 떠맡기고 있지는 말아야지.

 

 


 

 

김기홍 시인 / 盛夏

 

 

 山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은 알겠네 山 속에 길이 있다 해도 갇혀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친절한 길 그 허리 잘라 먹고 얼마나 성큼 앞서기 시작하는 지 山에서 길을 물어 본 사람은 알겠네 한 세상 어떻게 걸려드는 지 상관 없다는 듯 조절을 모르겠다는 듯 물오른 숲 불오른 하늘 닫아 잠그는 모습을 한순간의 貞節을 위해 뒤따르던 발자국들 얼마난 은밀한 순교를 거두고 있었는가를 알겠네 소리가 빛을 삼키는 걸 보았네 살아있음을 기억한 채 열려버린 동공 매미들의 진저리 치는 침묵을 보았네 단내나는 꽃의 정수리를 보았네 이미 빛도 소리도 질식한 거대한 무덤을 보았네 山에서 길을 잃어 본 사람은 알겠네 正午의 숲이 얼마나 고요한 지 얼마나 아픈지 알겠네 아무 것도 증명할 것이 없는데 시퍼런 칼을 제 살 깊이 꽂고 있는지 또 칼집을 나온 殺意는 검고 지친 잎새들을 헛되이 반짝이며 符籍처럼 몸살 앓는 등불처럼 헛되이 심지를 끌어 올리는지 푸르름의 罪를 묻는 벼랑 즐거운 골절의 유혹이여 스스로를 거름 삼아 싱싱해지는 늪이여 길이 없으니 알겠네 다 들어내야 가벼워지는 바람 제 살을 베지 못하는 걸 알겠네 기대어 길 내는 법을 알겠네 山 속에서 길 묻지 않는 걸 알겠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믿겠네 손에 쥘 수 없는 가벼움 나 믿겠네

 

 


 

 

김기홍 시인 / 찬란한 幕間

 

 

 한 밤중에 문득 깨어났습니다 누군가 나를 이 곳에 눕혀놨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房에 난 혼자 깨어난 것입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는데 한 장면이라도 떠올려 보려고 애써 보지만 어둠만 그득할 뿐 당신은 어떠한 추억도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壁처럼 나도 어둠도 굳게 껴안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늘고 아름다운 머리칼 하나 당신의 겨드랑이에서 퍼지던 푸르고 어지럽던 날 콩 비린내 하나 아프기 위해서 스스로 도려내던 영롱하던 살 점 하나 그리하여 앙상한 가지만 남은 당신이 기르던 사나운 짐승의 그림자 어느 것 하나 당신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리는 자의 몫이어야 할 추억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당신이 과연 돌아오실지 덜컥 겁이 납니다 나에게 남은 것은 꿈 없는 잠이거나 잠 없는 꿈 입니다 결연히 손을 맞잡는 壁들 어둠들 하지만 점 점 이 房이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따뜻해지기 시작합니다 잠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것들 主人을 잃어 섬길 이 없는 개처럼 서성이며 지쳐 자신의 발등을 핥던 성긴 어둠 성긴 슬픔들이 어둠을 불러들이고 슬픔을 불러들이고 고통을 불러들입니다 물 밖으로 올라온 生涯를 예감하듯 이상합니다 이제 어둠으로 뭉친 어둠은 슬픔으로 뭉친 슬픔은 고통으로 뭉친 고통은 더이상 어둡지도 슬프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머무르지 않습니다 부르기만 해도 이 세상이 환해지는 당신의 아름다운 이름을 장막을 걷어냅니다 아 세상 가득 쏟아지는 빛 어둠속의 찬란한 通路 그래서 눈을 멀게하고야말 당신은 이미 돌아와 내 안에 들어와 있고 이 房은 나의 房이란 것을 알게됩니다

 

 


 

김기홍(金基弘) 시인

1967년 충북 청원 출생. 등단작품 :<길위에서> 외 4편. 시집 『로망을 찾아서』가 있음. 한국문인협회. 두줄시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