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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석영 시인 / 고욤나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

홍석영 시인 / 고욤나무

 

 

시골 뜰 안의 고욤나무 뒷모습이 외롭다

 

의미도 영문도 모른 채 심는 손자와

묘목을 심고 물을 주며 가꾼다

 

지친 자들의 그늘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곳에 머물던 이들은

도회지로 가고

더러는 하늘로 가기도 하였다

 

그곳을 지키며

파수꾼이 된 나무가

구슬피 울고 있다

 

까맣게 타 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나무를 심은 손자가

하염없이 늙어가고

까치 무심히 날아든다

 

나는,

아버지로 또 할아버지로 살아가며

고욤나무 아래에서 할아버지를 뵙는다

 

-시집 『기다려지니까 사랑이다』에서

 

 


 

 

홍석영 시인 / 내가 돈다, 바람개비처럼

 

 

내가 돌고 네가 돈다

사람들이 돈다

 

땅이 돌고 산이 돈다

강이 돌고 바다가 돈다

 

지구가 돌고 세상이 돈다

태양이 돌고 우주가 돈다

 

온통 돌기만 하는 세상 한복판 중심에

내가 서 있다

 

선풍기가 전원 없이도 그냥 돌아가고

풍차도 세월도 돌아간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내가 돈다, 바람개비처럼

 

 


 

 

홍석영 시인 / 눈썹달

 

 

하늘은 온통 까맣고

점 하나 외로이 걸어가고 있다

 

웃음 사이로 눈썹이 빠져버려

우스꽝스러워도

캄캄한 밤이라 주눅들지 않았다

 

취기에 허우적대던

내 그림자가

비틀비틀 흔들려도 부끄럽지 않았다

 

 


 

 

홍석영 시인 / 바람도 기침을 한다

 

 

아낙의 등짝 같은 겨울

하늘거리는 바람결에도 기침을 한다

 

창틈으로 기어든 햇살이

짓무른 눈자위를 어루만진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손등

얼어 깨진 장독 쓰다듬는다

숯덩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빛바랜 문풍지 누런 새가 되고

하늘에선 반죽 덜된 국수의 파편들이

햇발 사이로 시샘을 하며 내려 앉는다

 

잠의 변두리쯤에서

멧새 한 마리 서성거린다

 

 


 

 

홍석영 시인 / 오일장터

 

 

바람을 맞으며숲속을 거닐다

하늘을 바라본다

 

닷새 만에

인사와 안부를 나누는

무지갯빛 사연들의 향연

새 주인을 찾아 기웃거린다

 

정성껏 말린 태양초

빨갛게 물든 양철 지붕은 한가로이 뜨거움도 잊은 채

졸고 있다

 

오는 길손 방긋이 맞을 채비에

마음도 구름 위를 날아간다

 

소꿉장난 같은 삶

오늘도 생의 여정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비밀스런 여행이 또다시 시작된다

 

-시집 『내가 돈다, 바람개비처럼』에서

 

 


 

 

홍석영 시인 / 가마우지의 낚시

 

 

입에 한 시간의 노동이 물렸다

매양 노동으로 얻는 것은 밥이 아닌 허무

 

눈부신 비늘이 슬픔처럼 반짝이는 석양에

붉은 물감이 들숨 속으로 들어온다

 

살기 위한 노동은

대책 없는 삶의 소진

 

목에 매인

한 오라기의 끈은

사신死神의 넥타이

 

오늘도 물어 올린 것은 헛된 욕망일 뿐

 

-시집 『내가 돈다, 바람개비처럼』에서

 

 


 

홍석영 시인

서울 출생. 숭실대학교 영문과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2007년 <문학예술> 시 부문 당선 등단. (사)한국문인협회 영등포지부 회장 및 서울지회 이사, 영등포예술인총연합회 감사, 미네르바 작가회 회원, (사)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및 전무이사 역임. 영등포문인협회 부회장. 제8회 한국문인협회 서울시문학상 등 수상. 시집 <바람도 기침을 한다> <내가 돈다, 바람개비처럼>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