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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한 시인 / 그림이라고 말하는 그 표정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7.

이길한 시인 / 그림이라고 말하는 그 표정

 

 

녹슬고 때 묵은 색들이 가고 있는 중이다

깊은 혼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각의 틀을 그어본다

어떤 것도 잡지 않은 손이 춤추는 손이 된다

 

춤사위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동안

그때마다 제 몸이 투명체가 된다는 것을 춤꾼은 알고 있어

깊게 생각에 빠질 때 인식하지 못하는 표정의 투명성

그 거리의 시간과정이 투명체이지

카메라 가방을 메고 다니는 사람

물끄러미 서서 표정역할을 떠올리는 연극배우가 한동안 머문다

카메라에 찍히는 일이 부업이고, 사진을 찍는 것은 표정수집이겠지

얼룩진 문을 그릴 것인가

문 안쪽의 사연을 그릴 것인가

고심은 오십대 단역배우의 수집과정이지

가난한 무대를 껴안기 위해 충무로에서 땀을 닦는다.

어둡기 전 골목을 걷는 게 어울린다고, 그 주변에 흡수되는 특별함이라 하는

검정에 표정을 그린 자

검정에서 주황을 얻은 자

검정의주황을 힘껏 움켜쥔 자

 

누런 풀의 바람결 따라, 나는

주변 곳곳에 놓인 대본의 갈피가 앞뒤로 팔락거린다, 나는

힘겹게 사랑하던 것들을 보듯이 대본을 넘기며 풀잎들을 찾는다

열려 하거나 열리지 않는 것이다

문이 열리지 않아도 그 주변은 열려 있으므로 그 문을 열린 것이라고 하자

위아래좌우에 묵은 때와 녹슨 천연색과 같이

때론 그림보다 더 잘 그린 시간들을 풀어놓는다

빛의 쪼글쪼글한 광량보다는

눈비바람이 잠근 곳

그 옆에

그 표정들, 비스듬히 세워둔다

 

 


 

이길한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계간 《예술가》 2011년 가을호에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서양화가로서 개인전 6회 개최.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3회. 한국미술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