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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외수 시인 / 은행나무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8.

이외수 시인 / 은행나무

 

 

너는 인어의 비늘이다

아침에 제일 먼저 바람을 받아

잘게 썰어서 한 짐씩

내 뜨락에 쏟아 놓고

노오란 햇빛만 새로 솎아서

내 빈 가방 속에 담아 놓고

더 멀리도 더 가까이도 갈 수 없는 거리

첫사랑 속태우던 그 먼시간

모두 모아 물소리로 설레고 있다

 

 


 

 

이외수 시인 / 흔들리는 나무에게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부는 날에는 바람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 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강을 건너가는 한그루 나무를 보라.

 

 


 

 

이외수 시인 / 들리시나요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이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지요

그리운 이름들은 모두

 

구름 걸린 언덕에서

키 큰 미루나무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면 들리시나요

 

그대 이름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

 

 


 

 

이외수 시인 / 바람꽃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 땅을 뚫고 올라와

눈부시도록

새하얀 자태로 피어 있는

바람꽃을 보았다

 

너와 함께 보지 못했으므로

정말 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수 시인 / 아주 잠깐 동안

 

 

어느 날 그대

우산도 없이

혼자 걷고 있을 때

나도 아주 잠깐 동안

소리 없는 이슬비로 내려서

그대

한쪽 어깨라도

흠씬 적셔 줄 수 있다면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평생 비를 기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네

 

 


 

 

이외수 시인 / 빨래줄

 

 

왜 당신의 마음은 세탁해서 널어놓지 않나요

 

-시집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쉴 때까지』에서

 

 


 

 

이외수 시인 /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늘에는

땅에는

내게는

그대

 

 


 

 

이외수 시인 / 일몰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막연하게 기다렸어요

서산머리

지는 해

바라보면

까닭없이

가슴만 미어졌어요

돌아보면 인생은 겨우

한나절

아침에 복사꽃

눈부시던 사랑도

저녁에 놀빛으로

저물어 간다고

어릴 때부터

예감이 먼저 와서

가르쳐 주었어요.

 

 


 

 

이외수 시인 /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이외수(李外秀) 시인 (1946-2022)

1946년 경남 함양 출생. 춘천 교육대학 중퇴. 1972년 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견습어린이들>이 당선, 1975년 1975년 중편소설 <훈장>으로 [세대]지의 신인문학상 수상. 단편 <꽃과 사냥꾼> <고수> <개미귀신> <자객열전> <틈> 중편 <장수 하늘소> 장편<꿈꾸는 식물> <들개> <칼>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산문집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등. 2022.04.25 폐렴으로 별세. 향년 7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