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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목련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8.

정호승 시인 / 목련

 

 

목련은 피고 아들은 죽었다

진흥가슴새의 가슴에 피가 흐른다

흰나비 한 마리가 눈물을 떨구고 간다

나는 고속도로 분리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든다

술취한 마음은 찢겨져 갈기갈기 도마뱀처럼 달아나고

고맙게도 새벽에는 봄비가 내린다

아들은 잡놈이었다

봄비를 맞으며 서둘러 서울로 도망간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할 줄도 모르고 죽은

아들은 잡놈이었다.

꽁초를 찾아 불을 붙인다

고속도로 분리대 위에 다시 드러눕는다

사람들은 쓸쓸하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이제 내 가슴에 아들을 묻을자리는 없으나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용서해야 한다

비는 그치고 고속도로는 안개에 싸인다

낡은 트럭이 푸성귀 몇 점을 떨어뜨리고 달아난다

 

 


 

 

정호승 시인 / 자살에 대하여

 

 

창밖에 펄펄흩날리던 눈송이가

창문 안으로 슬쩍 들어와

아무도 모르게 녹아버린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그런 것이다

굳이 나의 함박눈을 위해 장례식을 할 필요는 없다

눈이 그치고 다시 창가에 햇살이 비치면

그때 잠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된다

나도 한때 정의보다는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도 한때 눈물을 깨끗이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렸으므로

나의 죽음을 위해 굳이 벗들을 불러모을 필요는 없다

나의 죽음이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너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죽음이 너에게 기쁨이 된다면

눈이 오는 날

너의 창가에 잠시 앉았다 간다

 

 


 

 

정호승 시인 / 낙법落法

 

 

내가 당신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낙법이었다

당신이 당신의 생애 전체를 기울여

나를 메치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어두운 골목길에 쓰러뜨리고

벼랑 아래로 힘껏 떠밀어버린 것도

결국은 나에게 낙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넘어지면 넘어지면 되고

쓰러지면 쓰러지면 된다는 것을

새가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처럼

기차를 타면 기차에 나를 맡기는 것처럼

넘어지면 넘어진 곳에

쓰러지면 쓰러진 곳에 나를 맡기면 된다는 것을

진실로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넘어져도 제대로 넘어지는 법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데에

내 존재를 다하여

나는 가난한 당신의 사랑이 필요했다

 

 


 

 

정호승 시인 / 장작을 패다가

 

 

장작을 패다가

도끼로 발등을 찍어 버렸다

피가 솟고

시퍼렇게 발등이 부어올랐으나

울지는 않았다

다만

도끼를 내려놓으면서

가을을 내려놓고

내 사랑을 내려놓았다

 

 


 

 

정호승 시인 / 산낙지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 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 / 국화빵을 굽는 사내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

눈물로 따끈따끈한 빵을 만들 줄 아는군

오늘도 한강에서는

사람들이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그 물을 먹어도 내 병은 영영 낫지 않는데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 넣을 줄 아는군

눈물의 깊이도 잴 줄 아는군

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2021년)

 

 


 

 

정호승 시인 / 택배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중에서

 

 


 

 

정호승 시인 /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 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겼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鄭浩承) 시인

1950년 경남 하동군 출생.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국문학석사)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 《항아리》 《모닥불》 《기차 이야기》 등, 산문집 《소년부처》 등.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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