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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시인 / 청춘
파랗게 쓰지 못해도 나는 늘 안녕하다 안녕 직전까지 달콤하게 여전히 눈과 귀가 돋아나고 누군가를 오래오래 사랑한 시인으로 안녕하다 이것저것 다 지나간 재투성이 언어도 안녕하다
삼각지에서 6호선 갈아타고 고대 병원 가는 길 옆자리 청년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청년이 파랗게 보였다 연두 넝쿨처럼 훌쩍 웃자란 청춘 우린 나란히 앉았지만 피아노 하얀 건반 두 옥타브나 건너뛴다 난삽한 청춘의 형식이 싸락눈처럼 펄럭이며 나를 지나가는 중이다
안녕 속은 하얗다 난 가만히 있는데 여기저기 정신없이 늘어나는 재의 흔적 아무도 엿보지 않는 데서 설마, 하던 청춘이 일어나서 그냥 나가버렸다 청춘이 아니면 말없이 짐승처럼 고요하다
고대 앞에서 내릴 때 새파란 보르헤스 청년이 하얀색으로 흔들리는 내 등을 보고 있었다
최문자 시인 /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흔들림으로 서 있던 파란 대문 그 대문을 바라보고 가끔 생각난 듯 개가 짖어댔다 덧바른 낯선 색깔을 알아보고 짖어댔다 어느 날은 죽은 나무대문이 다시 나무로 살아날 것처럼 사정없이 짖어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골목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802호 지금은 거기에 산다 열쇠를 돌리려면 한참씩 문 앞에서 달그락거리지만 잠긴 저 안은 언제나 쇠처럼 고요하다 하루 종일 이 색깔 저 색깔로 덧칠 당하고 돌아온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희망처럼 보이는 푸르딩딩한 폐허를 아무도 짖어대지 않는다 사라진 개를 찾아나서고 싶다
최문자 시인 / 붉은색 도시
“선생님, 우린 붉은 신호등이 나타나면 차를 멈추고 키스를 했어요. 정지된 모든 사물들 앞에서. 누군가는 푸른 사과를 깎는 중일텐데...... 태연하게 다음 신호등이 빨갛게 다시 나타나고 믿을 수 없게 우리는 또 키스를 했어요. 먼 구름 사이로 달빛이 쏟아졌고 그 속을 헤엄치고 싶었어요. 차차 사라지는 붉은 빛 신호등 차는 무엇이 금지된 줄도 모르고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어요. 도시는 충분히 붉어져가고 있는데 누가 여긴 꿈 속이라고 말했어요. 여전히 정지하여 지킬 것이 있나봐요 사랑은 붉은 색으로 도시를 만들어요. 미안해 미안해 하면서 붉은 신호등을 선채로 세워나요. 붉은 빛이 엄청나게 쏟아져요. 다른 색들이 일제히 붉은 색 도시를 노려봐요. “선생님, 그 사람이 어디로 갔을지 모르지만 붉은 신호등 앞 거기 꽃을 두고 왔어요. 살아나라 살아나라 죽어버린 사람과 죽은 키스들아 “선생님, 모든 색이 안보여서 멈출 수 없어요 8월에도 가고 겨울에도 가요 붉은 신호등 앞으로 죽은 새와 바람이 키스하는 붉은 색 도시로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최문자 시인 / 염색
색깔도 뿌리를 갖고 있네 서로 부둥켜안는다고 물들지 않네 누가 누구를 염색했다는 말 한꺼번에 지문이 사라지는 일이네 사람은 살갗이 아니네 역사와 또 다른 하늘이 있네 푹푹 삶아도 구름은 폐기되지 않네 불온한 물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쳐들어오네 얼굴은 젖지만 하늘은 적시지 않네 딱, 한 번 참으로 위험했네 갈기갈기 실뿌리까지 막무가내로 물들고 싶은 적이 있었네 자욱한 물감이 밀려와 무릎뼈에 고일 때 흰 뺨에 뜬 붉은 구름 아프게 문질러도 지워지는 건 아주 조금이었네 하나의 영혼이 아주 다른 또 하나의 영혼 속으로 염료가 되어 드나들었다는 말 가장 외로운 일이네 가끔씩 그에게 황홀한 색깔을 빌려 오는 나 순백의 양말을 벗어 놓는 일이네 물들어 보일까 봐 눈을 꼭 감네
최문자 시인 / 청도, 방음리에 듣다
아침이면 동촌 할머니 콩밭 푸른 콩잎들 깨끗한 햇살 한줌 놓치지 않으려고 쑥쑥 손바닥 펼치는 소리 들었습니다.
한낮 가득 옥양목玉洋木 흰 빨래 속 맑은 물기가 뽀도독 뽀도독 마르는 소리 들었습니다.
저물 무렵 그대와의 저녁밥상을 위해 맑은 샘물을 길어 담근 쌀들이 편안하게 불어나는 소리 들었습니다.
최문자 시인 / 오늘
오늘은 처음 본 과거 네가 준 감정이란다
해는 뜨는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나오는 것
뜨거워질 때까지 뚫어지게 나를 보는 것
오늘은 벌써 몇 번째인가 한 번 한 번 하다가 나로부터 멀리 가서 푸른 파밭으로 들어가서 생각으로 맞아죽은 게
오늘이 다 가도록 어쩌자고 해는 숨을 곳을 모두 없애버리고 죽는거니
그 남자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마지막 인사도 폭삭 주저앉힌 그 남자
벌써 몇 번 째니 돌아오고 자꾸 돌아오는 오늘이 많아도 처음 본 과거 같은 느낌 네가 준 감정이란다
계간 『가히』 2023년 여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드로잉
그가 진심을 보여달라 했다 뭘 보여주는 것 나는 그게 잘 안됐어 날씨 흐린 날은 진심도 흐려져 다 흘리고 그 것만 바라봐도 그게 잘 안보여
흐린 날 그는 자꾸 눈을 감는거야 죽어가고 싶어했지 모름 모름 모름 너머 안다고 여겼던 모르는 진심 꽃은 아니라는 거지
말하기 힘들면 밑그림이라도 그려달라 했다 물이 찬 신발을 신고 가장 멀리 가던 거꾸로 가던 진심이라 믿었던 시퍼런 빛 나는 사각형을 그렸다 어느 순간 함께 죽었다가 같이 살아나던 내가 껴안고 잠들었던 시퍼런 손수건 같은 말도 안돼 틀린거야 뭘 보여주는 거 나는 그게 잘 안돼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3년 가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뚜껑을 닫는 사람들
방금 불행 하나가 뚜껑이 열리더니 내 앞을 휙 지나갔는데 정신 차리기 싫었다 하루 종일 내가 열어놓은 뚜껑들
귀가해 보면 모조리 뚜껑이 닫혀있다 누구 짓이야?
뚜껑은 너무 큰 이야기들을 덮어서 통째로 무덤처럼 보였다
너의 말이 깨지는 이유를 알겠다 종일 살려고 뽀글거렸겠지 틈새에다 대고 중얼거렸겠지 아, 나만큼 너만큼 막힌 부분에서
누가 이 돌 같은 뚜껑을 저리로 굴려주나
사람들은 이야기 하면서 무심코 뚜껑을 닫았다 사람들이 뚜껑을 닫고 또 무엇인가 이야기 했다
흰 구름장 아래 거기 밀들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뚜껑이 열린체로 대궁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막무가내로 밀냄새가 나를 치고 올라왔다
갑자기 정신 차리고 싶었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3년 7월호 발표
최문자 시인 / 유년
괜히 종이가 필요했다 나에게
펜과 심란한 마음과 절벽과 배추밭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이 마당을 놓지 않았던 도마뱀들 말 못하는 우물 하나 있었다
나 만의 종이도 아닌 종이에 사람들이 절벽 아래로 내던진 꽃을 그렸다
시 첫 단어 첫 행을 이렇게 시작했다
문장이 오기를 24시간 기다렸다
생각 만 해도 강까지 흘러가주던 시냇물과 계속 흰 새 두 마리가 수만번의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와 같이 살아주고 말해주었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이슬
수정이 안되는 것들
오, 감이 온다 새하야면서 점점 더러워지는 순서 죽어가면서 점점 커지는 순서
난 사랑이 이슬모양인 줄 알았다
녹아서 동그라미가 다 없어지도록 깨끗하기가 얼마나 정교한지 항상 생각의 맨 위에다 이슬을 올려놓았다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가까이 가면 과한 깨끗함 그 반복에 속아서 돌아오던 것 이슬이라 생각했는데 무쇠 보다 단단했다 딱딱하고 평평했다 맺혀있는 줄 알았는데 움직였다 사라졌다 귀퉁이가 닳아 이미 둥근 것이 끝나도록
맹렬히 자라는 풀 위를 몇 십년 두리번거렸다 이슬을 찾아 천천히 말하려고 노력한다 익숙해지지 않던 키스 같은 도구 같은 적막하고 추운 입술 같은 구조적으로 사랑의 뜨거운 부분인지 아닌지 이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슬이 흙을 박차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깨끗함인 줄 알았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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