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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청춘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8.

최문자 시인 / 청춘

 

 

파랗게 쓰지 못해도 나는 늘 안녕하다

안녕 직전까지 달콤하게 여전히 눈과 귀가 돋아나고 누군가를 오래오래

사랑한

시인으로 안녕하다

이것저것 다 지나간 재투성이 언어도 안녕하다

 

삼각지에서 6호선 갈아타고 고대 병원 가는 길

옆자리 청년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청년이 파랗게 보였다

연두 넝쿨처럼 훌쩍 웃자란 청춘

우린 나란히 앉았지만 피아노 하얀 건반 두 옥타브나 건너뛴다

난삽한 청춘의 형식이 싸락눈처럼 펄럭이며 나를 지나가는 중이다

 

안녕 속은 하얗다

난 가만히 있는데

여기저기 정신없이 늘어나는 재의 흔적

아무도 엿보지 않는 데서

설마, 하던 청춘이 일어나서 그냥 나가버렸다

청춘이 아니면 말없이 짐승처럼 고요하다

 

고대 앞에서 내릴 때

새파란 보르헤스 청년이

하얀색으로 흔들리는 내 등을 보고 있었다

 

 


 

 

최문자 시인 /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흔들림으로 서 있던 파란 대문

그 대문을 바라보고

가끔 생각난 듯 개가 짖어댔다

덧바른 낯선 색깔을 알아보고 짖어댔다

어느 날은

죽은 나무대문이 다시 나무로 살아날 것처럼

사정없이 짖어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골목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802호

지금은 거기에 산다

열쇠를 돌리려면 한참씩 문 앞에서 달그락거리지만

잠긴 저 안은 언제나 쇠처럼 고요하다

하루 종일

이 색깔 저 색깔로 덧칠 당하고 돌아온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희망처럼 보이는 푸르딩딩한 폐허를

아무도 짖어대지 않는다

사라진 개를

찾아나서고 싶다

 

 


 

 

최문자 시인 / 붉은색 도시

 

 

 “선생님, 우린 붉은 신호등이 나타나면 차를 멈추고 키스를 했어요. 정지된 모든 사물들 앞에서. 누군가는 푸른 사과를 깎는 중일텐데...... 태연하게 다음 신호등이 빨갛게 다시 나타나고 믿을 수 없게 우리는 또 키스를 했어요. 먼 구름 사이로 달빛이 쏟아졌고 그 속을 헤엄치고 싶었어요. 차차 사라지는 붉은 빛 신호등 차는 무엇이 금지된 줄도 모르고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어요. 도시는 충분히 붉어져가고 있는데 누가 여긴 꿈 속이라고 말했어요.

 여전히 정지하여 지킬 것이 있나봐요

 사랑은 붉은 색으로 도시를 만들어요.

 미안해 미안해 하면서 붉은 신호등을 선채로 세워나요.

 붉은 빛이 엄청나게 쏟아져요.

 다른 색들이 일제히 붉은 색 도시를 노려봐요.

 “선생님, 그 사람이 어디로 갔을지 모르지만 붉은 신호등 앞 거기 꽃을 두고 왔어요.

 살아나라

 살아나라

 죽어버린 사람과 죽은 키스들아

 “선생님, 모든 색이 안보여서 멈출 수 없어요 8월에도 가고 겨울에도 가요

 붉은 신호등 앞으로

 죽은 새와 바람이 키스하는 붉은 색 도시로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최문자 시인 / 염색

 

 

색깔도 뿌리를 갖고 있네

서로 부둥켜안는다고 물들지 않네

누가 누구를 염색했다는 말

한꺼번에 지문이 사라지는 일이네

사람은 살갗이 아니네

역사와 또 다른 하늘이 있네

푹푹 삶아도

구름은 폐기되지 않네

불온한 물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쳐들어오네

얼굴은 젖지만

하늘은 적시지 않네

딱, 한 번 참으로 위험했네

갈기갈기 실뿌리까지

막무가내로 물들고 싶은 적이 있었네

자욱한 물감이 밀려와 무릎뼈에 고일 때

흰 뺨에 뜬 붉은 구름

아프게 문질러도 지워지는 건 아주 조금이었네

하나의 영혼이 아주 다른 또 하나의 영혼 속으로

염료가 되어 드나들었다는 말

가장 외로운 일이네

가끔씩 그에게

황홀한 색깔을 빌려 오는 나

순백의 양말을 벗어 놓는 일이네

물들어 보일까 봐 눈을 꼭 감네

 

 


 

 

최문자 시인 / 청도, 방음리에 듣다

 

 

 아침이면 동촌 할머니 콩밭 푸른 콩잎들 깨끗한 햇살 한줌 놓치지 않으려고 쑥쑥 손바닥 펼치는 소리 들었습니다.

 

 한낮 가득 옥양목玉洋木 흰 빨래 속 맑은 물기가 뽀도독 뽀도독 마르는 소리 들었습니다.

 

 저물 무렵 그대와의 저녁밥상을 위해 맑은 샘물을 길어 담근 쌀들이 편안하게 불어나는 소리 들었습니다.

 

 


 

 

최문자 시인 / 오늘

 

 

오늘은

처음 본 과거

네가 준 감정이란다

 

해는 뜨는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나오는 것

 

뜨거워질 때까지

뚫어지게 나를 보는 것

 

오늘은 벌써 몇 번째인가

한 번

한 번

하다가

나로부터 멀리 가서

푸른 파밭으로 들어가서

생각으로 맞아죽은 게

 

오늘이 다 가도록

어쩌자고 해는 숨을 곳을 모두 없애버리고 죽는거니

 

그 남자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마지막 인사도 폭삭 주저앉힌 그 남자

 

벌써 몇 번 째니

돌아오고 자꾸 돌아오는

오늘이 많아도

처음 본 과거 같은 느낌

네가 준 감정이란다

 

계간 『가히』 2023년 여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드로잉

 

 

그가 진심을 보여달라 했다

뭘 보여주는 것

나는 그게 잘 안됐어

날씨 흐린 날은

진심도 흐려져

다 흘리고 그 것만 바라봐도 그게 잘 안보여

 

흐린 날

그는 자꾸 눈을 감는거야

죽어가고 싶어했지

모름 모름 모름 너머

안다고 여겼던 모르는 진심

꽃은 아니라는 거지

 

말하기 힘들면

밑그림이라도 그려달라 했다

물이 찬 신발을 신고

가장 멀리 가던

거꾸로 가던

진심이라 믿었던

시퍼런 빛

나는

사각형을 그렸다

어느 순간 함께 죽었다가 같이 살아나던

내가 껴안고 잠들었던

시퍼런 손수건 같은

말도 안돼

틀린거야

뭘 보여주는 거

나는 그게 잘 안돼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3년 가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뚜껑을 닫는 사람들

 

 

 방금 불행 하나가 뚜껑이 열리더니 내 앞을 휙 지나갔는데

 정신 차리기 싫었다

 하루 종일 내가 열어놓은 뚜껑들

 

 귀가해 보면 모조리 뚜껑이 닫혀있다

 누구 짓이야?

 

 뚜껑은 너무 큰 이야기들을 덮어서 통째로 무덤처럼 보였다

 

 너의 말이 깨지는 이유를 알겠다

 종일 살려고 뽀글거렸겠지 틈새에다 대고 중얼거렸겠지 아, 나만큼 너만큼 막힌 부분에서

 

 누가 이 돌 같은 뚜껑을 저리로 굴려주나

 

 사람들은 이야기 하면서 무심코 뚜껑을 닫았다

 사람들이 뚜껑을 닫고 또 무엇인가 이야기 했다

 

 흰 구름장 아래

 거기 밀들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뚜껑이 열린체로 대궁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막무가내로 밀냄새가 나를 치고 올라왔다

 

 갑자기 정신 차리고 싶었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3년 7월호 발표

 

 


 

 

최문자 시인 / 유년

 

 괜히 종이가 필요했다

 나에게

 

 펜과 심란한 마음과 절벽과 배추밭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이 마당을 놓지 않았던 도마뱀들

 말 못하는 우물 하나 있었다

 

 나 만의 종이도 아닌 종이에

 사람들이 절벽 아래로 내던진 꽃을 그렸다

 

 시

 첫

 단어 첫 행을 이렇게 시작했다

 

 문장이 오기를

 24시간 기다렸다

 

 생각 만 해도 강까지 흘러가주던 시냇물과

 계속 흰 새 두 마리가 수만번의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와 같이 살아주고 말해주었다

​​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이슬

 

수정이 안되는 것들

 

오, 감이 온다

새하야면서 점점 더러워지는 순서

죽어가면서 점점 커지는 순서

 

난 사랑이 이슬모양인 줄 알았다

 

녹아서 동그라미가 다 없어지도록 깨끗하기가 얼마나 정교한지

항상 생각의 맨 위에다 이슬을 올려놓았다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가까이 가면

과한 깨끗함 그 반복에 속아서 돌아오던 것

이슬이라 생각했는데 무쇠 보다 단단했다 딱딱하고 평평했다

맺혀있는 줄 알았는데 움직였다 사라졌다

귀퉁이가 닳아 이미 둥근 것이 끝나도록

 

맹렬히 자라는 풀 위를 몇 십년 두리번거렸다

이슬을 찾아

천천히 말하려고 노력한다

익숙해지지 않던 키스 같은

도구 같은 적막하고 추운 입술 같은

구조적으로 사랑의 뜨거운 부분인지 아닌지

이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슬이 흙을 박차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깨끗함인 줄 알았다

​​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최문자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등. 박두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신석초문학상, 한국서정시문학상 등 수상. 협성대 문창과 교수, 同 대학 총장, 배재대 석좌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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