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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동집 시인 / 추일별곡(秋日別曲)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8.
신동집 시인 / 추일별곡(秋日別曲)

신동집 시인 / 추일별곡(秋日別曲)

 

 

하마트면 일 뻔도 한

위험한 관계를 미안히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떠날 차례

그러면 둘이는 다

추일풍경이 되어보는 날이다.

채칼에 뚝뚝 떨어지는

물배 이슬을 거두며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 자리에 앉고 보면

우리네 生活史는 그래도 숨이 도나부다.

작별의 술잔에 남빛 고름은 비친다.

허리춤에 찬 향주머니

인형의 실눈썹은 비친다.

가을이 너의 소매끝에 닿아도

함부로 설레이진 말 일

가지에 앉은 새가 엿보고 있으니.

아리는 미소를 한 군데 가릴

토끼풀 하나

노랗게 익은 탱자알 하나

너의 손에 들어 더욱 좋은 일.

秋日은 마침 別曲이 된다.

가다가 잘못 산신령을 만나면

꼰바둑이나 한 판 둘 여유는 있어야지

이마 푸른 高麗(고려)선비는

 

 


 

 

신동집 시인 / 눈

 

 

아주 너를 멀리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내 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는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平地 가로 떠났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 대신 내가 떠나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신동집 시인 / 어떤 사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즉히 나는 묵례(默禮)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 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 번 나의 눈을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즉히 나는 묵례(默禮)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 없이 헤맬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시집 《빈 콜라병》(1968)

 

 


 

 

신동집 시인 / 하일시초(夏日詩抄)

 

 

 여름도 방학철 오전 한때를 서창(西窓)에 다붙은 포도시렁 아래 고흐의 걸상을 내다놓고 한동안 시름없이 잠기는 일이 있다. 댓평 될까마는 땅그늘이지만 오전엔 집에서도 기중 시원한 곳이다. 담장과 시렁 사이로 열린 하늘 조각이 또한 유난히 맑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여름날의 내 영혼의 빛깔이랄까.

 

 이 파란 하늘 조각을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허공엔 빈 조롱이 하나 흔들리듯 말며 시름없이 걸려 있다. 이따금 한두 마리 이승의 새는 날아가도 그들 눈에 이 조롱은 보일 리 만무하리라. 조롱 속에 담긴 내 마흔의 여름날들, 생각은 하염없이 물레실을 푼다.

 

 어느덧 뙤약빛도 발밑으로 밀리고 시렁에도 후끈한 김이 서리면 다른 데로 나는 또 그늘을 옮겨야 한다. 그러나 조롱은 매양 하늘 깊은 한자리에 걸려 나를 따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상념도 이날은 이걸로 끝나는 셈이다.

 

 한 번은 나도 이 집을 떠나리라. 떠난 뒤에도 여전 조롱은 한 자리에 걸려 어느 다른 주인의 여름 한 철을 즐겁게 해 줄는지, 오다 가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행인』 1975 / 『신동집 시전집』

 

 


 

 

신동집 시인 / 포스터 속의 비둘기

 

 

포스터 속에 들어 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 앉아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도 웬만치는 변한다.

비둘기가 노닐던 한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 버린 집통만

비바람에 털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 볼 하늘이 없다.

마셔 볼 공기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 보아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속에 던져 살라 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그는 찍어 낸 포스터

수 많은 복사 속에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어 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탈이다.

 

 


 

신동집(申瞳集) 시인 (1924~2003)

1924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거쳐 1959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 1948년 <대낮>이라는 시집으로 문단에 나옴, 1954년 <서정의 유형>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음. 1982년에는 계명대학교 외국어대학 학장을 지냄. 작품집으로는 <사랑에 눈뜬 자여> <염열에 끓는 돌이여> <추일별곡> 등이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옥관문화훈장·세계시인상·대한민국예술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