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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시인 / 책 읽는 남자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잘 가꿔진 책 페이지를 넘기면 잎사귀들이 푸르게 반짝이며 제 속에 숨어 있는 나이테를 알아달라고 손짓한다
나는 매일 한 그루씩 책을 베어 넘긴다 피도 흘리지 않고서 책들은 고요히 쓰러진다 아니면 한 장씩 찢어 입에 넣고 오래 우물거린다 이 나무의 성분을 나는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글자들의 푸른 잎맥을 따라가다가 간혹 벌레가 파먹는 자리를 발견할 때도 있다 비록 이 나무는 꽃도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시원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책이 덩굴을 내밀어 내 몸을 휘감아오른다 무수한 문장들이 내 몸에 알 수 없는 무늬를 새기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아무리 베어내도 무성하게 자라오르는 책나무
책나무 속에 들어가 눕는다 내 속에 뿌리 뻗은 나무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새떼
남진우 시인 / 비어(蜚語)
비를 뚫고 그가 왔다.
자욱한 비내음을 몰고 그는 거실 가득 빗소리를 풀어놓았다. 선반 위 유리병들이 덜그럭대고 물에 젖은 편지가, 진단서와 영수증이 둥둥 떠내려가고 벽을 따라 도마뱀이 기어 내려왔다.
그의 등 뒤로 그가 데리고 온 빗방울마다 뚫린 구멍이 번득이고 도마뱀이 기어간 자국을 따라 비린내를 풍기며 이끼가 번져갔다. 비를 뚫는, 빗방울마다 구멍을 내는 그의 번득이는 눈과 입이 허공을 들이마시는 동안 유리창은 튀어오르는 빗물을 받아내느라 어두웠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집 곳곳에 물웅덩이가 패였다. 형광등의 불이 나가고 컴퓨터 화면이 꺼지고 전화기가 빗소리로 가득 차오르기까지 비가 전해주는 말들이 집에서 집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불온하게 퍼져나갔다. 비에 갇힌 집마다 사방 벽과 마루가 비밀스러운 속삭임으로 끓어올랐다가 날아다니는 물고기들로 어지러웠다가 순식간에 텅비어버렸다.
비가 풀어놓는 소식이 시들해질 무렵 비에 뚫린 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를 뚫고 그는 다시 떠났다.
도마뱀도 이끼도 다 사라진, 집이 있던 자리, 비어 있는 허공에 보이지 않는 말들이 들끓고 있었다.
남진우 시인 / 석모도 해변을 거니는 검은 개 한 마리
눈보라가 걷힌 해변 저 멀리 검은 개 한 마리가 어정거리고 있다 낭떠러지 아래 푸석한 갯벌을 가로질러 펼쳐진 바다 사는 것이 끝없는 모욕의 연속일 때 문득 눈보라 속으로 가웃없이 사라지고 싶을 때 늘 귓가에 철썩이는 파도 바닷물에 앞발 담그기도 두려운 듯 야윈 개는 멀찍이 떨어져 수평선으로 향하는 몇 갈래 물 위의 길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미워했던 것들 이젠 다 부질없다 까슬한 턱을 쓰다듬으며 마른 기침을 해보았지만 가시를 곤두세운 바람이 쓸고 가는 지상엔 아침 햇살에 흩날리는 자디잔 먼지 조각들 뿐 눈 가늘게 뜨고 개 한 마리 모래 둔덕을 넘어 낭떠러지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아무런 영광도 없이 물거품처럼 부서지고 싶은 회한도 없이 늠름하게, 천천히, 꼬리를 늘어뜨리고 석모도 아침 해변을 산책하는 검은 개 한 마리
남진우 시인 / 저녁빛
붉은 저녁해 창가에 머물며 내게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하네…… 붉은빛으로 내 초라한 방안의 책과 옷가지를 비추며 기나긴 하루의 노역이 끝났다 하네…… 놀던 아이들 다 돌아간 다음의 텅 빈 공원 같은 내 마음엔 하루 종일 부우연 먼지만 쌓이고…… 소리 없이 사그라드는 저녁빛에 잠겨 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먹임에 귀기울이네…… 부서진 꿈들…… 시간의 무늬처럼 어른대는 유리 저편 풍경들…… 어스름이 다가오는 창가에 서서 붉은 저녁에 뺨 부비는 먼 들판 잎사귀들 들끓는 소리 엿들으며 나 잠시 빈집을 감도는 적막에 몸을 주네……
- 시집 『타오르는 책』 중에서
남진우 시인 / 로트레아몽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外套를 걸치고 몇닢 銀錢과 함께 외출하였다. 木造의 찻집에서 코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快感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詩를 태워버리고 아, 그 겨울 내 슬픈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속으로 한없이 下絳하는 헝가리언 랍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시의 고독, 머리맡에 펼쳐진 十二使徒의 눈꺼풀에 住祈禱文文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준비할 것 낢, 혹은 우리의 좌절에 대한 代名詞. 솟아오름으로 가라앉는 변증법적 사라의 이중성.
4 가로등이 부풀어오른다. 흐느거적리는 밤공기 사이로 킬킬대는 불빛의 리듬. 안개는 선술집 문앞에 서성이고 바람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다. 쉬잇 설레이는 잠의 音階를 밟고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보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와 살 섞으며 한잎 두잎 지워지는 뱃고동 소리, 조용히 모래톱에 속삭이는 잔물결을 깨우며 한 여인이 꽃을 낳는 것을.
5 물결치는 시간의 베일을 헤치고 신선한 과일처럼 다디단 그대 입술은 그대 향기로운 육체는 깊은 昏睡로부터 꿈을 길어 오른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박수를 치며 젖은 불꽃의 옷을 벗으라 나의 하아프여. 가만히 촛불을 켜고 기다리자.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地中海의 녹색 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피어나는 연꽃 속에 눈뜨는 보석을 찾아.
6 子正이 되면 샤갈과 함께 방문하는 러시아의 雪海林. 모닥불 옆에 앉아 우리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船舶을 그 긴 항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군요 밤안개가 걷히겠지요. 바람부는 海岸 푸른 고요 속에 목마른 자 홀로 남아 기도하는 子正의 海岸 그 어둠 속에 눈은 내리고 내리고 幼年의 마을 어디쯤 떠오르는 북두칠성. 地上의 모든 불빛이 고개 숙인다.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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