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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광일 시인 / 비 오는 날 채소화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9.
서광일 시인 / 비 오는 날 채소화

서광일 시인 / 비 오는 날 채소화

 

 

남쪽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아침에 우산을 넣었다가 뺐다가

젖을까 봐 젖으면 몽땅 울어버릴까 봐

가방에 딱 맞는 2단 우산

 

막차를 타러 가는 길에 비가

모퉁이를 돌아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어째 어제보다 오늘이 조급한 걸까

어깨 위로 들이치는 이 풍경 뭐지

 

비 소식에 인도에 늘어섰던 노점들도

파란 야외용 테이블도 안 보이는데

문은 닫혔지만 불이 켜진 약국들

뭐야 저 할매 비가 쏟아지는 골목

 

좌판을 펴고 앉아

그것도 열댓 개가 넘는 바구니에

각양각색 채소들 빗물을 받아

어찌나 싱그러운지 막 씻다 나온 얼굴

 

혜화역 3번 출구와 학림다방 사이

골목 입구에서 비가 주룩주룩

돌아선 연인의 뒷모습처럼 내리치는데

흘러내리는 듯 뚝뚝 떨어져 내리는 듯

 

조금 있으면 막차도 끊길 시간

다니는 사람도 드물거나 바쁠 때

너무나 고즈넉하여 한 폭의 수묵 담채화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눈을 껌벅이다가

 

천 원짜리 한 장 꺼내지 못하고

부랴부랴 막차를 탔네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의 실루엣

저 골목을 돌면 다시는

 

그림자마저 흘러내린 사람

희미해지다가 까마득해지는 이름

알록달록 강렬한 빛깔만 굴절되며

비에 젖어 주렁주렁 바구니에 차오르는데

 

빗물을 머금고 울다 울어

종이 죽처럼 찢긴 건지 뭉뚱그린 건지

얼마나 남겨놓고 할매는

저만치 흘러가 버렸을까

 

 


 

 

서광일 시인 / 성에

 

 

 눈은 그쳤을까. 겨울 새벽 어깨에 내린 잠을 턴다. 미명인지 아직 창 낯이 어둡다. 형광등을 켰더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유리창 가득 흰나비 떼가 앉았다. 누가 쪽창에다 밤새 텃밭을 일구어 놓았을까.

 

 씨를 뿌리다가 문득 이랑을 고르기 시작한 이의 마음이 저런 무늬였을 것이다. 사이사이 심어 둔 푸성귀처럼 수액을 퍼 올리고 살을 다지느라 힘을 다하여 뿌리를 뻗었을 걸 생각하니 내 몸이 싱싱해진다.

 

 날이 새는가 또 눈이 내린다. 수북하게 쌓여 숲을 만들 것이리라. 몇은 톡톡 창을 두드린다. 만졌더니 슬그머니 이것들이 손가락 끝에다 둥근 열매를 떨군다. 온몸이 전부 투명한 씨앗인.

 

 


 

 

서광일 시인 / 세탁기를 돌렸더니 당신이 돌아왔네

 

 

갑자기 입을 맞추는 바람에

옥상에 떨어진 남의 집 속옷처럼 난감했지만

입술 속은 말랑말랑하고 조금씩 침이 고여

이미 오래전부터 흠모해 왔던 사람인 것처럼

당신의 깊은 추궁이 실린 포옹을 내버려 두었네

 

전혀 안부가 궁금하지 않았는데

부엌 창에 수평으로 밀려온 저물녘 햇살처럼

얼굴을 붉히며 당신은 돌아왔지

야속하겠지만 한 번도 사랑한 기억이 없어

세탁기에서 다 된 빨래를 꺼내듯

무심하게 당신 닮은 것들을 추려 보아도

쏟아져 버린 세제처럼 달려드는 당신

 

포옹의 크기만으로 시간의 간격을 짐작하기란

무거운 빨래를 견디다 부러져 버린 건조대 같아서

당신에게만 남은 사랑의 물기는 너무 축축해

타액을 나누며 이대로 뒤엉켜 버릴까

집게 빠진 이불처럼 멀찌감치 달아나 버릴까

세탁기를 돌려 놓고 깜박 또 잠이 들까 봐

당신이 덜 마른 채 달려와 내가 어느새 흠뻑 젖을까 봐

 

 


 

 

서광일 시인 / 웃는 여자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웃었다

너무 지쳐 오는 길에 한잔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몇 개 안 되는 문장의 주어는 고객님이다

 

CCTV

그 속에서 웃고 있을 자신을 상상한다

백화점 1층 화장품 매장 앞에는

쓸데없이 손님들이 많다

 

문을 잠그고 창을 닫고

욕을 하며 잡히는 대로 집어던진다

매니큐어가 튀고 스킨로션이 터진다

침대 시트에 피가 흥건한 날도 있었다

 

거울 속에서 흘기고 있는 쟨 누굴까

헝클어진 모나리자 티슈처럼 웃었다

울었다 선풍기 목을 부러뜨렸다

스마트폰을 박살냈다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

8평 반 지하에서 온몸으로 드리핑을 완성한다

거울 조각 속 수많은 그녀가 운다

웃는다 마스카라처럼 흘러내린다

 

내일은 모처럼 쉬는 날이다

 

 


 

 

서광일 시인 / 풍림아파트 106동 407호

 

 

당신은 407호에 대해 잘 안다

 

방, 화장실, 거실 겸 방, 베란다

독신자 아파트 복도식 독립동

덜컹 현관문이 열리더니

할아버지와 손녀가 손을 잡고 나왔다

꼬부랑 할머니가 들어갔다

 

부부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있는 욕지거리가 난무했다

베란다에 이불이며 옷가지가 잔뜩 걸렸는데도

소리가 소리를 넘어 위층으로 올라온다

쿵이 쾅을 넘어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복도에 모인 항아리와 화분들과 당신은

삼대가 함께 사는 가능성과 마주한다

당신은 애인 집에 얹혀살기도 하고

이혼한 엄마 남편과 밥을 먹기도 하고

작은방을 월세로 내놓기도 한다

 

독신자 아파트엔

아무도 혼자 살지 않는다

 

 


 

 

서광일 시인 /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공중전화

코트를 입은 외국인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동남아시아 어디쯤

짧은 한숨 끝에 동전을 꺼낸다

사내는 좌우를 살피더니 급하게 걷는다

툭 종이 가방이 떨어진다

걸음을 무르고 재빨리 줍는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단거리 주자처럼

몸이 심하게 앞으로 쏠린다

힐끔 뒤를 본다 걸음이 빨라진다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오를 때

무심코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지하철 4번 출구를 나가는 중이었다

사내는 뭔가에 쫓기는 듯

계단이 끝나자마자 뛰기 시작한다

붙잡고 싶었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을 쫓고 있는 기분

노동자로 보이는 외국인 한 무리가 내려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자음과 모음들이 부딪친다

이미 늦었다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에서

 

 


 

 

서광일 시인 / 정읍사

-toy crane

 

 

저거

올라올듯 말듯

달님이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무심코 지나가는 당신에겐

한심하고 미련하고 시간 낭비 같지만

그의 미간은 오롯하다

멀리멀리 비춰 주시오

접힌 지폐를 단번에 펴는

초현실적 손놀림

어귀야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또 넣는다

아가리를 벌리고

삼발이 크레인이 내려간다.

무게중심 걸렸다.

저자에 가 계신가요

편의점 앞 인형 뽑기를 점거한 사내

진 데 디딜까 두려워라

처음 인형을 받은 딸아이

그 환한 웃음에다

인생 나머지를 걸 것 같았는데

덜컹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서류 가방이 흔들린다

어느 곳에나 놓으시오

주머니를 또 뒤진다

임 가는데 저불까 두려워라

집에 갈 엄두가 없다.

어긔야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서광일 시인 / 그림자를 짓이겨 무릎에 발라 주었다

 

 

온종일 쉬지 않고 은행잎이 내렸다

도로에 터져 죽은 새처럼 바스러질 것 같아

택배 상자에 적힌 이름과 주소 위에다

검정 유성매직펜을 덧칠하는 중이지만

그림자가 흘러내리도록 울 수 있다면

 

마음에 심장처럼 판막이 있다고 오해했다

 

한참 말문이 트이던 때 같았는데

엄마는 아궁이에서 연탄을 꺼내며 울었다

방이 한 칸, 부엌도 하나, 눈물은 두 개

연탄구멍은 너무나 많아

두꺼운 솜이불 아래 입김만 내민 채

엄마 눈에 달린 여러 개의 그림자를 세다가

잠이 들었고 겨울이 다 가 버렸다

 

투두둑 떨어져 내리는 고드름

언젠가 저토록 허망한 소리를 내며 떠날 텐데

쌀이 떨어지면 덩달아 연탄도 떨어져

어떻게 울음에서 소리만 걸러 내고 엄마는

삼십 촉 전등알처럼 깜박거렸을까

 

올이 풀려 버린 잠의 뜨개들

부르트도록 하얗게 일어난 거스러미들

그림자마저 무너뜨리고 파헤쳐서 도굴하는 굴착기

철로 위에서, 소스 배합기에서, 철제 코일 아래서

좁은 골목에서 믿을 수 없는 심폐소생술이 시도됐지만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마음이 생각을 들어 올리는 지렛대라고 믿었던 것 같다

 

기억상실증이 오면 내가 누구인지 뭘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숨은 잃어버리지 않을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학교와 병원까지 폭격했고

핵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계획을 당차게 발표했다

신은 질문의 방향일 뿐

 

대답을 구하는 건 너의 그림자거나 나의 그림자

그림자 저편에 뭘 박아대는지 관자놀이가 온종일 아팠다

심하게 넘어지며 바닥에 끌리고 쏠려서

마음이 잘 일어서지 못했다

 

 


 

서광일 시인

1973년 전북 정읍 출생. 199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0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을 통해 등단. 현재 극단 <작은 신화>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중.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