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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연 시인 / 당신은 귀뚜하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9.
김혜연 시인 / 당신은 귀뚜하미

김혜연 시인 / 당신은 귀뚜하미

 

 

귀뚜라미야

귀뚜하미

귀뚜하미가 아니라 귀 뚜 라 미 라고

귀 뚜 하 미

 

당신은 당신을

모른 체한다

또 속는 나의 부유물들이

내 안에서 응결된다

 

당신의 필체를 닮은

쇠약한 변론들

나의 숲은 잊힌 계절에도

불면의 울음들로 따갑다

 

귀뚜라미가 운다

당신의 눈동자를 닮아

가장자리가 찢긴 나의 꿈 안에서

 

귀뚜하미가 온다

염원을 일찍 배워버린

아이를 닮은 비극처럼

 

당신은 지워진 연못

당신은 당신인 체하는 고요

 

당신은 자주 모른 체하고

나는 자주 속아

자주 당신스럽다

 

가난한 정렬의 우리가

웨죽웨죽 웃으며 귀뚜하미

웨죽웨죽 울며 귀뚜라미

 

—시집 『근처에 살아요』, 애지, 2023.

 

 


 

 

김혜연 시인 / 주전자

 

 

 제발

 입 좀 닥치면

 안되겠니

 주절주절 끝도 없이

 쏟아내는 푸념에

 지쳤다

 할 말도 삼키면

 약이 된다

 때로 독이 되어

 시린 네 몸

 격정으로 내몰아도

 그만 못 본 척

 눈 감으면 안되겠니

 있잖니

 별것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 크게 가지면

 순식간에 잊힌다

 제발 줄줄 침 튀는

 그

 방정맞은

 입 좀

 닥치면 안되겠니

 뚜껑 열리기 전에

 바로 너

 

-시집 <음각을 엿보다>에서

 

 


 

 

김혜연 시인 / 양말은 반쪽의 아버지를 신고

 

 

엉킨 사지들 속에서

삶의 중점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씨실과 날실의 틈, 용해되지 않는

숨의 틈의 틈들

지나감의 잔량들

불쑥 불손한 마음 없이도

끌려가게 되는

갓길들과 오래된 길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벗어

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를

휘장처럼 널었지

갓 태어난 오월의 눈송이를

바다를 떠도는 갓 죽은 한낮의 별빛을

본 듯한 봄 어느 날

아버지의 복사뼈는 봉분을 닮아

따뜻해 보였지

기다려도 들키지 않는

숨바꼭질에

우리는 옷장 속에서

줄어든 적 없이

까맣게 까맣게 길어졌지

손을 뻗어 기억이 씻긴

자신을 건질 때

관자놀이엔 지나간 적 없는

노을이 번졌을 것이다

벗겨진 양말에서

용해되지 않을 민말들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시집 『근처에 살아요』 에서

 

 


 

 

김혜연 시인 / 화분

 

 

아기 이불 빨래를 널다

3층 베란다 아래로 떨어진 화분

 

타향살이 위안이다, 깨뜨리지 마라

목마름이 덜한 녀석으로 골라

옹기종기 곰팡이가 자라는

큰딸 신혼집에 걸어주신 아버지의 첫 선물

 

뒤뚱거리는 만삭에도 거르지 않던 볕과 물 한 모금

쟁반 하나 들어갈 틈 없던 귀향 이삿짐 트럭에도

턱 하니 한 자리 차지했던 화분

 

마음 한 칸, 몇 분의 자유로운 두 손이면 될 것을

기고 서는 아이 핑계로 안타깝지만 죽었겠거니

비슷한 놈으로 사다놔야겠구나

 

아기 이불을 털다

이불에 묻어 3층 베란다 아래로 떨어진 딸랑이

 

낮잠에서 깨면 찾을라

냉큼 내려간 화단 구석

부서진 몸뚱이, 이파리마다 갈색 멍에도

괜찮다며

환하게 웃고 있는 화분

 

- 시집 『근처에 살아요』(애지, 2023)

 

 


 

 

김혜연 시인 / 당신을 구하는 문제

 

 

 대괄호를 열면

 당신은 오래된 전축처럼

 먼지 아래 있다

 혼이 없는 당신도 당신이라면

 

 괄호 밖 당신이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건다

 햇빛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

 가난에 어울리지 않는 선율은

 아름다운 폭설 같다

 

 중괄호를 열고

 나는 나의 기억 순으로

 당신의 시간을 약분하고

 물구나무를 한 당신은

 당신을 나눈다

 재가 될 때까지

 당신으로만 고립될 때까지

 

 슬픔의 꼭대기에선 우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선택을 미루는 법을 몰라

 되감기로 웃고 말아요

 

 괄호를 열자 빈 당신이 펼쳐져 있다 당신이 떠나야 완성되는 당신의 푸가 당신만이 들을 수 없는 당신의 응답 슬프게도 먼지만이 당신 위에서 춤을 춘다 햇살 아래 죽음은 아무 일도 아니지 괄호를 닫는다 문제의 반대편에 나만 남는다

 

-시집『근처에 살아요』(애지, 2023)에서

 

 


 

김혜연 시인

1980년 제주 출생. 2020년 《시와 경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현재 한라산문학동인회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시집 『근처에 살아요』. 댄스 강사로 현재 댄스학원을 운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