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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희 시인 / 돌아
돌아 너무 맑은 날 아침은 네 가난한 거죽에도 새 옷 한 벌 해주고 싶어
어느 영원의 반짝이는 개울 하나 너랑 손잡고 건너고 싶어
영(靈)이니 육(肉) 이니 이런 성가신 말 다 버리고 쨍쨍 빛나는 저 하늘의 부신 이마같이
한나절 귀먹은 나귀처럼 가고 싶어 돌아, 네 새끼발톱에 비치는 피멍이 우리가 말하는
그런 사랑이쟈? 그쟈?
그렇다, 라고 대답해줘 너무 맑은 날 아침은 백 번도 더 그렇다, 라고 말해줘
날 버리고 간 붉은 구름에게도 옛날의 버림받은 검은 꽃에게도 변덕쟁이 늙은 애인에게도
그늘보다 그늘 아래 물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줘
돌아 지금 막 눈뜨는 착한 돌아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에서
유강희 시인 / 개망초
이 고개 저 고개 개망초꽃 피었대 밥풀같이 방울방울 피었대 낮이나 밤이나 무섭지도 않은지 지지배들 얼굴 마냥 아무렇게나 아무렇게나 살드래 누가 데려가 주지 않아도 왜정 때 큰고모 밥풀 주워 먹다 들키었다는 그 눈망울 얼크러지듯 얼크러지듯 그냥 그렇게 피었대
-시집 <불태운 시집>에서
유강희 시인 / 장례식장
부의(賻儀), 라고 쓰인 흰 봉투 뒷면에 아직 산 자의 이름을 쓰고 그걸 윗주머니에 넣는다 <조문>을 하기 위해 아직 산자는 이미 죽은 자와 아직 산자를 위해 아직 산자를 더 많이 위해 재빨리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죽은 자의 사진 앞에 <느림>으로 엎드린다 한 번 더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 제법 애통한 낯으로 아직 산자가 아직 산자를 향해 또한 차례 〈되돌림〉으로 엎드린다 그리고 나서 흰 꽃을 꺼내듯 흰 봉투를 꺼내 아직 산자는 아직 산자 앞에서 아직 산자의 이름이 적힌 그것을 밀봉된 상자의 좁은 구멍에 애써 밀어 넣는다 아직 산 자들이 등뒤에서 자꾸 밀쳐도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영광된 삶에 당당히 한 표를 행사하듯, 아무 동요 없이 그는 아직 상자 앞에 서 있다
유강희 시인 / 돌확
자식 일곱을 뽑아낸 이제는 폐문이 되어버린 우리 어머니의 늙은 자궁 같은 오래된 돌확이 마당에 있네 귀퉁이가 떨어져나가고 이끼가 낀 돌확은 주름 같은 그늘을 또아리처럼 감고 있네 황학동 시장이나 고풍한 집 정원에는 제법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받아먹고 눈이 오면 그냥 눈을 받아먹으며 뿌리를 내릴 생각도 않네 뿌리 대신 앉은 자리엔 쥐며느리들만 오글오글 세월처럼 모여 사네 하지만 지금 돌화 속엔 내가 싸릿재 저수지에서 잡아온 새끼 우렁 하나 돌젖을 빨아먹으며 자라고 있네 돌젖에 눈물처럼 금이 가 있네
유강희 시인 / 내가 대팻집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대팻집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생각해낸 건 이 나무 근처에 오리나 치며 살아야겠다 였다 더 불리지도 더 줄이지도 않으며 내 힘닿는 만큼의 마리 수를 놓고 소란하면서도 다정한 오리 울음을 하루치의 양식으로 삼아야겠다 였다 내가 두 번째로 대팻집나무를 보았을 때 불꽃처럼 퍼뜩 생각해낸 건 저녁이 올 무렵, 제일 높은 가지 끝 등불 하나 내걸고 꽃집나무, 물소리집나무, 귀뚜라미집나무, 혹은 눈발집나무란 것도 세상에 있나 직접 찾아봐야겠다 였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세 번째로 대팻집나무를 보았을 때 생각해낸 건 나도 어느새 눈 귀먹은 한 마리 늙은 당나귀 되어 외딴집 저녁불빛집나무가 되어봐야겠다 였다 저녁 불빛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눈감는지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나무가 되어보는 거였다
* 대팻집나무: 대팻날의 집을 만드는데 주로 이 나무가 사용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불교문예≫, 2012년 여름호,
유강희 시인 / 생채
이렇게 작은 장작개비를 넌 본적 있니? 이 맵고 달고 또 시원한 불꽃을 너는 아삭아삭 씹어본 적있니?
어머니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도끼 대신 식칼을 들고 눈처럼 흰 무를 또닥또닥 패고,
찬장 밑 귀를 모으던 겁 많은 귀뚜라미는 또 그걸 흉내내어 귀뚝귀뚝 제 눈앞의 어둠을 팬다
손등 위로 기어오르는 발갛고 아린 불빛들을 어머니는 자꾸 훔쳐내리고
그만 나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불꽃, 장작개비가 되고 싶어진다
누구에게나 제 몸안에 자신이 아니면 팰 수 없는 젖은 장작개비가 있다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에서
유강희 시인 / 내가 아는 별들
깜박이를 켜놓고 신호를 기다린다
정체(停滯) 없는 하늘이라고 적는다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에서
<동시> 유강희 시인 / 뒤로 가는 개미
개미가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나방 한 마리를 물고 기어간다 뒤로 기어간다 뾰족한 엉덩이에 눈이 달렸나 뒤로 기어간다 길도 얼른 자리를 바꿔 뒤가 앞이 되게 한다 노란 나방은 그냥 따라간다 아니 개미를 밀고 앞으로 간다
-동시집, 《뒤로 가는 개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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