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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인구 시인 / 나랑 화해하기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0.
이인구 시인 / 나랑 화해하기

이인구 시인 / 나랑 화해하기

많이 실망 했겠지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많이 웃었겠지

산다는 건 살구나무 아래서 자두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일

 

떨어지는 살구에게 자두 옷을 입히는 일

떨어지는 것이 살구인지 자두인지 몰라

혀를 내밀어 받아 보지만 맛조차도 구분이 되지 않아

자두처럼 살구를 품는 일

멈춰 선 채로 미리 오지 않을 주검을 온몸으로 기다리는 일

 

많이 웃었겠지

이제 웃음은 떠나간 첫사랑처럼 돌아오지 않아

자두나무에 걸린 웃음이든 살구나무에 걸린 웃음이든

모두 떠나버린 얼굴들같이 나를 바라보지

 

산다는 건 붉은 태양 아래서 비 내리기를 기다리는 일

가끔씩 마른하늘에 작두 타는 날처럼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온몸을 내맡겨보기도 하지만 온전이란 말은 그 어디에도 없어

말없이 고개를 떨구지

 

산다는 건 자두나무 아래서 살구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일

살구 향기 자두 향내 멀리 가지 못하는 향기들의 배꼽 여행

구부러지기도 하는 직각의 빗나간 춤사위

자두랑, 살구랑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0월호 발표

 

 


 

​이인구 시인

1991년 《시와 의식》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세종 우수 도서 선정)등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