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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율 시인 / 씨앗이 시에게
씨앗 하나가 나무를 키울때 나무가 직립해서 숲을 이룰때 나무 치고 숲 베어서 만든 피 뜨거운 이 종이 위에 너는 꽃 한 송이 피워보았는가 너는 씨앗 한톨을 품어보았는가
김민율 시인 / 비가역 천칭저울
양손을 부싯돌처럼 부빈다 불씨가 살아나고 있다
두 접시의 불
왼손에는 선사의 불을 쥐고 있다
아버지는 어린 딸의 무병(無病)을 기원하며 소지를 태워 불을 공중으로 올리셨다
불의 풍습이 왼쪽 접시 쪽으로 기울면 평형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기억을 계량한다
손바닥에는 식어가는 엄마의 온기 탯줄을 끊고, 첫 말을 숭배하던 배냇 시절이 흔적으로 남는다 손금은 고고학적 시간의 눈금을 긋는다
어느새 왼쪽 접시는 비어 있고 오래전 신앙이 꺼져버렸다
이제 오른손이 담은 유일무이한 불 새 영혼과 육체가 오른쪽 접시에 올려진 채 천천히 기울며 낯선 여자의 일생을 다하여 타오르고 있다
—《시로 여는 세상》2016년 여름호
김민율 시인 / 모래내 고대 서사시
사천천 얕은 물속 모래에 맨발을 묻고 고요한 눈빛으로 물결의 행간을 읽다가 물방울 o 하나 쥐고 스무 살에 마을을 떠났다
서울서 문장 짓는 일에 몰두했네 발잔등에 주름진 물결무늬 어원을 찾아 첫 문장이 뿌리 내린 곳에 돌아왔네
메뚜기가 벼이삭 갉아먹다 행간과 행간 사이를 뛰어다닌다 마을 노인들은 허리를 구부려 천년을 이어 쓴 서사시를 일군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의 일대기와 미신들과 설화가 퇴적된 행간을 경작한다
마을 바깥 가까운 마을에 신라 명주군 왕릉이 있고 노인들 몇몇 이름에는 강릉 김씨 돌림자가 있다 내 고조할아버지는 돌림자 경자를 할아버지는 진자, 아버지는 기자, 남동생은 남자를 썼네
조상신은 경작한 문장에 아직 살아 있다 새벽에 눈빛들이 깨어나 땅에 얽힌 혈통과 신앙을 지으면서 농사가 잘되길 빈다
우리 마을은 모래 많은 냇물이 흘러 모래내라고 불리네 강릉 김씨들이 볍씨 같은 이름들을 뿌렸네
골재채취업자들이 논바닥을 파헤쳐 밑줄 친 모래의 문장을 파갔다. 우리 집도 아버지의 문장으로 지은 모래를 팔았다
가계의 서사를 경작해 엮어 놓은 행간과 행간 사이를 걸어 집에 간다 음력 초하루 마을 공동 제사 풍습을 읽으면서
땅은 마을의 고서로 발굴되어 지식과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팔린다고 한다 모두 서울이나 시내에서 들어와 사간다고 한다
계간 『문예바다』(2021년 봄호)
김민율 시인 / 아름다운 불
어떤 열정 어떤 설렘으로 타오르던 순수하고 불온한 책들이 꽂혀 있다
천장에 닿을 만큼 바닥에 층층이 쌓여 있는 헌 책들 바벨탑 같아 무너질 것 같은 불안한 세계의 높이들
우리는 헌 책방 골목에서 골목으로 영혼에 불지를 불씨를 찾아다닌다
예수와 부처 위에 과학서들 철학서들 소설과 역사서들 맨 꼭대기에 두꺼운 세계 대전이 몰려져 있지 사랑의 단상이 모든 세계를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지
갖고 싶은 책이 있어요 저는 근원적인 것에 끌린답니다 영혼의 고결함만큼은 꺼지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의 마음이 재가 되지 않게 잔혹해지지 않게 사람의 슬픔까지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우리는 순수와 이성과 감각과 사랑의 불을 찾아 윗 문장과 아랫 문장 사이 이 골목 저 골목 배회하는 사냥꾼들
어떤 책꽂이에는 죽은 신들이 실패하고 몰락한 왕들이 질서 있게 꽂혀 있다
운이 좋으면 구석을 뒤지다 타오르는 첫사랑의 신을 집어 들겠지 최초로 아름다운 사유의 불을 발명하겠지
- 계간 《포지션》 2023 여름
김민율 시인 /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의 독자
마을 노인들이 볕 좋은 마당에 나와 앉아 있다 팔랑이는 배추흰나비의 몸짓을 백 년 동안의 꿈을 지팡이로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고 있다
너희들은 봄 되면 다시 돌아오는데 죽은 사람은 왜 돌아올 수 없나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워하다 벚꽃에게 말 건네며 벚꽃을 번역해 읽던 엄마는 이제 세계문학을 펼쳐 읽고 있다
이른 봄 텃밭에 거름을 뿌려 놓고, 카프카의 변신을 공책에 베껴 쓰면서 세계정신을 갈아엎는다 위 문장과 아래 문장 사이에 고랑을 낸다
어떤 아름다운 씨눈을 틔우려는지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 씨에 관한 상상의 씨를 뿌린다
나는 마당을 기웃거리다 씨감자 싹을 읽고 있다 껍질 밖으로 첫 울음소리가 기어 나올 때 발아하는 자리마다 연둣빛 말문이 터지고 있다. 어떤 아름다운 서사가 시작되고 있다
짝눈이 고독한 출생과 죽음을 읽는 첫 독자다
김민율 시인 / 줄광대
가난하고 위태로운 나의 발자국들 끝도 없이 탄생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한다 무수히 많은 점들의 무한집합처럼
허공에 팽팽한 선을 그어 놓고 외줄 타는 줄광대처럼 슬픈 서사를 딛는다
제자리에서 반 바퀴 돌아앉으며 나의 이야기는 묘기를 부린다
아슬아슬하지 말줄임표 나의 사랑은 내 아버지의 장례와 잃어버린 시간에 관한 기억은
불연속의 연소 점들은 촘촘히 모인다
나의 사랑은 앞걸음질 하다가 높이 뛰어 올라 허공에 붕 떴다가 떨어질 듯 말 듯 줄 위에 내려 서서 아름다운 곡예를 한다
줄이 바르르 떤다
―『포지션』2023년 여름호
김민율 시인 / 소설(小雪) 무렵
칠판 앞에 거대한 시대적 서사와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의 세계가 내려앉았다 단 하나의 눈 속에 예술혼과 사랑이 응축된 어떤 난해한 구조의 결정체를 품고
학생들 질문과 대답이 줄기와 곁가지를 뻗는 동안 나의 눈 속에도 어떤 패턴과 구조가 생겨났지
첫 얼음꽃 같기도 하고 천사의 날개 같기도 하고 투명하고 얇고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언어가 불완전한 첫사랑의 형태였지
거대한 세계가 반짝이며 내 이름 불러 뭔가 질문하셨는데 긴장과 두근거림과 어떤 혼란이 뒤섞여 놓쳐버린 언어들이 허공에 흩날렸는데
어떤 의미들이 흩어져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세계 수업이 끝났다
스승께서 나를 불러 세웠네 (기)이거 들고 나 따라와!(기) 출석부와 소설 강의 교재를 가리킨 후 앞서 걸으셨네
소설(小雪) 속 화자 첫눈처럼 내려앉은 나는 누굴까 어떤 서사의 결정 구조로 전개되고 있는 걸까
강의실 출입문 바깥 스승을 뒤따라 몇 계단 더 높이 올라갔다 자라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첫 눈송이 그 순결한 시적 언어와 희디흰 혼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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