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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식 시인 / 후박나무가 있는 저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1.
이영식 시인 / 후박나무가 있는 저녁

이영식 시인 / 후박나무가 있는 저녁

 

 

소슬바람 속 후박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낡은 고무신 그림자 끌며 창가를 기웃거린다

어쩌면 내 전생이었을지도 모를,

저 나그네에게 술 한잔 권하고 싶다

해질 녘 빈손으로 겨울마차 기다리는 마음도

따스한 술국에 몸을 데우고 싶을 것이다

그늘 아래 쉬어간 사람의 안부도 궁금할 것이다

천장 한구석 빗물 자국처럼 남아 있는

기억 속으로 나무 그림자가 걸어 들어온다

아이 얼굴보다 큰 잎으로 초록세례 베풀고

허방 짚던 내 손을 맨 먼저 잡아 주었던

후박나무, 그 넉넉한 이름의 상장만으로도

내 삶의 든든한 배후가 돼 주었지

나는 저 후박한 나무의 속을 파먹으며 크고

늙은 어매는 서걱서걱 바람든 뼈를 끌고 있다

채마밭 흙먼지에 마른 풀잎 쓸리는 저녁

후박나무는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생각다가

빈 가지에 슬며시 별 하나를 내건다

세상의 창, 모든 불빛이 잔잔해진다

 

 


 

 

이영식 시인 / 갈라파고스

 

 

 오래된 잉크병이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책상서랍 속에 이십여 년 웅크려있지만 그는

이미 내 마음 밖 1,000km 멀리 갈라파고스 섬이다 섬의 입구는 화석처럼 단단히 봉해진 채

출입을 끊었다 마비된 듯 꼼짝달싹 않는 그에게 남은 것은 침묵의 자세뿐이다

 

 푸르다 못해 검게 말라붙은 저 유리벽 안에 내 상상을 뛰어넘는 코끼리거북 바다이구아나

왕바다도마뱀이 문자를 꿈꾸며 출렁거렸다는 종의 기원과 붓에서 펜촉으로 만년필까지 수천

년 섭렵했다는 변이의 역사가 믿겨지지 않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투박하고 허접해진 그 몰골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려 몇

번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도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다시 서랍 속 면벽의 자세로 되돌려 놓고는 했다

 

 가을도 깊어 소슬한 밤 어둠 속에서 왠 울음소리가 들린다 코끼리거북 바다이구아나 왕바다

도마뱀… 갈라파고스 群島의 부족 누군가 묵은 울음보를 털어내는 모양이다 안방 아랫목 자

리보존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잠꼬대처럼 늙은 잉크병은 문자 향 휘날리며 헤엄치던 옛적 푸

른바다를 꿈꾸고 있다

 

 


 

 

이영식 시인 / 티벳여우를 기다리며

 

 

해발 4,488m 암드록쵸

터키석 빛 호수에 풀렸다가 하산하는 길

라마승처럼 고고한 여우가 산다는 협곡 돌아서는데

차량 뒷바퀴에서 야릇한 쇳소리가 따라온다

오 마이 반메훔!

멈춰 선 버스, 타임벨트가 끊겼다

과열된 엔진부위를 식히기 위해

운전기사와 나는 물통 들고 시냇가로 나섰다

물을 긷기 위해 무릎 꿇고 손 짚다보니

허리가 자연스레 구부러졌다

지상에서 가장 높고 맑은 영혼의 땅,

그대 경배하라

산 그림자 속에 꾀웃음 감춘 티벳여우가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빨리빨리-

하루 수백km 내달리는 바람몰이 이방인에게

시간의 허리띠 풀어놓으라

느림의 보폭을 가져보라

타임벨트 짐짓 끊어놓고 나를 불러낸 게 아닐까

시냇물은 고요롭고 따듯했다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는 티베탄처럼 온기가 살아있다

버스는 몇 번 더 나를 내려놓고

오체투지를 시켰다

그럴 때마다 티벳여우와의 동행을 한 호흡으로 느끼며

냇물에 내 그림자를 띄워 흘리곤 했다

 

 


 

 

이영식 시인 / 낮달

 

 

거울 속보다 고요한 날

양지바른 블록 담 아래

노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빈 부대자루처럼 접힌 몸

번갈아 의자에 부렸다 세우며

명함판 사진을 박습니다

 

햇발 참말 좋아

잎새들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데

이승의 끝자리, 마지막

그 밤을 지킬 모습이라니!

얼굴은 오래된 놋쇠 빛이 되고

끊었던 담배에 손이 자꾸 가는데

주름 활짝 펴 웃으라는

빵모자 사진사의 주문에

덩굴장미만 벙긋벙긋 피어나는

날도 억수 좋은 날

 

影幀처럼 떠 있는 돛배 하나

늙은 복사나무 가지에 걸립니다.

 

 


 

 

이영식 시인 / 통돼지 바비큐를 굽다가

 

 

아이야, 숯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라

가볍다고 가벼움뿐이겠느냐

네 손에 들려 있는 그 검디검은 뼈에는

저울 위에 올려지지 않은 무게가 배어 있단다

불을 품은 간절한 기다림이 있단다

너는 바비규를 위해 불씨를 지핀다마는

목울대 타고 오르는 깊은 허기로

져녁 해의 긴 꼬리를 바라본 적이 있느냐

숯덩이도 태어날 때부터 검정은 아니었다

잘리고 터진 生木의 아픔과

숯굴헝을 기어온 시간들이

온몸에 그을려 있는 것이란다

 

통돼지 살진 몸뚱이가 세상을 돌린다

구수하고 기름진 냄새에 군침이 도느냐

아이야, 감탕빛 숯불을 보아라

뼈마디 툭툭 분질러주는 보시를 보아라

하얀 재가 되는 길을 지레 읽고

순순히 가루가 되는 사랑도 있다

훈제 바비큐 감칠맛이 혀끝에 녹을 때

연기 속 어딘가에 매운 가슴 있음을 아느냐

너의 첫 울음소리가 아침을 깨우던 날

청 대문 위 새끼줄에 달렸던 것은

솔가지와 숯의 신성이었단다

가벼움이 어찌 가벼움뿐이랴

 

 


 

 

이영식 시인 / 침묵의 재구성

 

침묵의 구조는 단순하다

배경이던, 주인이던

맡은바 정물로 앉아 버티는 것이다

구르거나 되바라지지 말고

순정히 각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

그러니까, 침묵의 화법은

지퍼로 입성을 견고히 채우는 것

재갈을 물리는 일이다

침묵을 한 껍질씩 벗겨보면

속이 텅 비었음을 곧 눈치 챌 것이다

침묵을 뜯어먹는 일은

공갈빵을 씹는 것보다 더 허무하다

그러나, 침묵은 잴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우울과 몽상의 묵시록,

그 무게에 눌려

목을 달아 맨 사람도 여럿이다

말라바르 공중정원에는 침묵의 탑이 서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장례가 치러지는 곳이다

시신을 탑 꼭대기에 올려놓고 독수리가 쪼아 먹게 한다

(어느 쪽 눈알이 먼저 파 먹힐까)

차안과 피안을 가르고 남은 뼈가 탑 우물로 떨어져

아라비아해海로 흘러들어갈 때

영원한 자유에 드는 법을 가르치는

사자死者의 서書

사거리 길 모퉁이

오와 열을 맞춰 쌓아올린 탑이 있다

노파의 하릴없는 기다림이 내장된 사과 피라미드

틈틈이 박혀 붉게 타오르는 저 벽돌은

또 하나, 침묵의 재구성이다

* 침묵의 탑(Tower of Silence) :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뭄바이에 있는 탑.


 

 

이영식 시인 / 겨울 담쟁이의 시

 

중세의 성 같은 돌담 집

몇 길 높이 담벼락에 시 한 편 걸려있다

겨울 담쟁이가 손으로 발로

온몸 밀어 올리며 쓴 육필 시화전이다

실핏줄로 겨우 이어붙인 아찔한

문장, 빛나는 수사修辭가 없다

여름내 펼치던 구호 모두 떼어내고

생활전선에 바짝 붙어선 동사뿐이다

허리춤에 매달린 끝물 열매 몇 개

그마저도 새들에게 털리고

알몸의 시는 겨울벽화로 붙어 있다

CCTV가 곳곳 눈 치켜 뜬 성채들

누구는 좌, 누구는 우를 읽고 가지만

그러든 말든 벼랑 끝에 붙어서

기어이 제 목소리를 펼쳐 보이는

겨울 담쟁이의 시,

얼고 부르튼 손으로

세한歲寒의 계절을 움켜쥐고 있다

-신작시집 ‘꽃의 정치’(지혜)에서

 

 


 

이영식 시인

경기도 이천 출생.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공갈빵이 먹고 싶다〉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공갈빵이 먹고 싶다』 『희망온도』 『휴』.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및 문화관광부 우수도서 선정. 한국시문학상, 2012년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수상. 현재 초안산시발전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