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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원 시인 / 붓다의 경전을 만나다
초파일에 아이들의 사주에 이끼가 끼지 않게 하려고 도계 황조리 마을도덕정사를 찾아갔다
동자승이 목어를 두드리며 산기슭에 숨어 사는 산짐승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때 깊은 계곡에서 내려온 열목어가 불전함에 정화수 한 바가지를 보시한다 어젯밤, 도시의 뒷골목에서 찾아와 법당을 서성거리던 쉰바람과 함께 나는 두 손 모아 합장을 한다
잣나무가지에서 108배를 드리는 청설모, 아랫마을짜장면집 철가방이 달아 놓은 연둥도 보인다. 밤 열두시의 어둠과 치열하게 싸우던 법당의 촛불은 눈이 충혈되어 있다 오늘따라 암자의 담장을 끼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붓다의 설법으로 들린다
늪의 발을 씻어주던 연꽃이 잘 왔다는 듯이 초록 귀를 펄럭이며 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계간 문학매거진 <시마》 2023년 가을, 제17호에서
정계원 시인 / 동백꽃개론
그들은 오동도에서 얼굴을 맞대고 산다
외투를 벗은 맨살로 붉은 생의 궤적을 그린다 한때는 수도꼭지의 입술이 터지는 추위와 맞서 싸우며, 두 눈이 실명된 날도 있었으리라 눈을 뜨지 못하는 씨앗에게 건넬 신의 계시를 찾아 암반 밑으로 뿌리를 내렸으리라 아니다 그믐달의 치맛자락이
서산에 가까워질 때 긴 칼을 찬 뒷골목 그림자들이 지하방에 감금시켜도 푸른정신으로 끝내 두 무릎을 꿇지 않았으리라 2월이 겨울강을 건너왔다고 잔설이 전해주던 날, 삼천궁녀가 절벽으로 온몸을 날리듯 그도 지상으로 낙하한다
그들이 붉은 목숨으로 부활하고 있다
정계원 시인 / 붓다의 발자국
나의 빈손에 살찐 가을이 담겨진다 오후다 한 알의 도토리가 공터에서 공회전을 하는 나비의 궁핍을 위해 떨어진다 실어증에 시달리다가 길을 잃은 강물의 이정표가 되려고 생의 8부 능선을 오르다 지친 사형수를 위해 풍문에 흔들리는 부표를 위해 명퇴신청서에 지문을 날인하고 돌아오는 불혹의 패딩잠바를 위해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늙은 새를 위해 된서리에 혼절한 들국화를 위해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리는 인력꾼을 위해 허기의 원을 헛도는 독수리를 위해 썩어간다 모든 것이 다 비워진 들판을 걷는 그는 붓다다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에서
정계원 시인 / 목탁조
두 마리의 어린새끼 새를 거느리고 살았다 어느 날,
독수리가 날아와 하늘을 한 바퀴 돌더니 새끼들이 온데간데 없다 밤이 늦도록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몸속으로 붉은 장맛비가 한없이 내렸다 그는 날마다 허공을 바라보며 체온이 없는 깃털만이라도 찾으려고 했다 혈관 속으로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슬픔을 쫓아 내려고 갈참나무를 쪼아댔다 몸속 슬픔은 콘크리트 보다 더 굳어졌다 새끼들의 그림자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저녁이 타들어가도록 또 쪼아댔다 갈참나무를 쪼아대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슴을 쪼아대는 것이었다 흰 눈은 북극으로 떠나고 들판에서 나비가 꽃과 정사를 벌이는 4월,
그는 어린새끼들의 영혼이 사라진 허공에 영산홍빛 눈물을 채우고 있다
정계원 시인 / 편백나무베개
장롱 속에서 편백향을 뿜어내는 여인을 만났다 내가 불혹이 되었을 때,
사막의 모래알만큼 어둠의 물결이 치는 밤, 그를 안고 잠속으로 들어가면 악몽이 사라지고, 나의 영혼이 산사의 감로수처럼 정결해 진다
산전수전 겪은, 장롱 속에 편백베개를 꺼내어 물푸레나무처럼 살아온 그녀를 생각하며 안고 산다 시장좌판대에 생선을 놓고 천 원짜리 지폐와 싸우다 돌아오던 저녁, 그녀의 온몸에서 생선비린내가 풍긴다 아니다 편백향기였다
하얀 소복을 입은 눈이 노모의 영정사진을 안고 어깨를 들썩이며 내린다 바늘이 찌르듯이 아픈 나의 명치끝, 그날따라 편백나무향기는 어떤 날보다 더 짙다
내가 흔들리는 날엔 편백나무베개가 내 등뼈를 잡고 어둠을 떨어준다
-2023년 『시현실』봄호 발표작.
정계원 시인 / 물닭갈비
아무 생각 없이 물닭갈빗집에서 닭갈비 3인분을 주문했다
전골냄비 속으로 욕망의 숟가락이 닿을 때마다 닭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이곳으로 오기전에 어미닭은 날갯죽지로 새끼들의 체온을 유지했으리라
눈비 막아주며 그들의 미래도 염려했으리라 맹금류를 피할 수 있는 고된 생존훈련을 시켰으리라 그러면서 어둠에 묻힌 저녁엔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도 했으리라
닭갈비 사이로 뼈의 육수가 출렁거리고 한 절음의 가슴살을 앞접시에 담는다 세 여자는 유년의 추억으로 간을 맞추며 미식의 회포를 풀고 있을 즈음,
닭갈비의 영혼을 위로라도 하듯 식당 문밖에서 탁발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한다 흰 닭살 위로 세 여자의 죄의 향연이 시작한다
벚나무가 흰 살점을 휘날리는 살풀이로 닭의 영혼을 빌어준다
-2022. 『시와시학』 겨울호 발표작
정계원 시인 / 화석에 가을여자가 피었다
검은 돌에 내가 국화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지하 어둠이 수억 년 동안 내가 먹고 자란 저녁밥입니다 암반 밑에서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끔, 세상 밖 사람들의 신발 끄는 소리도 들려왔지요 그럴수록 이 어둠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죽순처럼 자랐습니다 그러나 돌에 핀 국화꽃이 되기 위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에 얼굴을 묻고 한평생 살았지요 두 눈이 실명되도록 돌에 핀 국화꽃이 되려고 했으나 신은 나의 업을 씻어주지 않았지요 어느 날, 돌 깨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고 사람들의 검은 손이 지하의 내 몸쪽으로 뻗어왔습니다 침묵의 어둠마저 더 채울 수 없는 이곳, 한 줄기의 낯선 빛이 내 몸에 닿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영혼이 시들지 않는 돌꽃으로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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