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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려원 시인 / 귤이 파란을 버릴 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1.
김려원 시인 / 귤이 파란을 버릴 때

김려원 시인 / 귤이 파란을 버릴 때

 

 

지금은 귤이 파란을 버릴 때

속마음과 겉이 같아지는 때

어느 이름난 마을과 이웃들이 모반을 꿈꾸다

숨긴 생각 모조리 들켜버리는 때

울타리를 버리고 가시를 버리고

집 바깥을 버리고

밭으로 들어간 품종들

 

오래전 야반도주한 우리 집 탱자울타리가

밭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는

비좁다, 비좁다, 제 구역 늘리며 노래져 간다.

 

귤은 손을 많이 타는 과일

가시울타리를 밀치고 가출한 오빠 같고

활짝 펴진, 찡그렸던 꼭지들은

양손 가득 선물꾸러미를 들고 돌아올 오빠 같지만

어느 밭에선가 파란을 버리고 있거나

어느 가판대에서 가지런해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로도 둘로도 낱개로는 팔지 않는 귤은

일종의 화폐단위인 셈이고 봉지들의 속셈

 

가시를 매단 탱자 울타리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추위 근방을 지키고 있다.

 

 


 

 

김려원 시인 / 도마도

 

 

입속의 친밀이 내뱉는 발음이 있다.

오십 년 된 엄마가 맛깔난 사투리같이

토마토를 도마도로 먹는다.

붉은 놀 질펀히 익어가는

꽃받침 없는 저녁을

매년의 계절인 양 무덤덤 먹는다.

 

덕담이 때를 놓치면 이가 빠지고

악담도 늙으면

소곤소곤 꽃이 피므로

 

입속의 제철을 재촉하여

시큰거리는 잇몸의 체중을 빼거나

무성한 혓바닥의 잡풀을 뽑는 날엔

제 무게에 겨워 바닥을 친 말끝에

빨간 이빨자국이 나 있다.

과실들은 씨앗이라는 스스로의 식성이 있으므로

엄마의 소곤소곤이 욱신거린다.

 

새파란 토마토가 공손한 자세로 도마도

민낯의 발음으로 도마도

엄마의 말투로 도마도 도마도

도마도 낱낱의 줄기를 밀어 올리며

 

ㅡ변방 38집 『돌의 카톡」에서

 

 


 

 

김려원 시인 / 나무 잎에 내려앉는 시간

 

 

나무 잎이 물이드니

인생의 젊음도

세월에 농익어 물풀어가네

 

나무 잎에 시간이 내려앉으니

인생에 세월이 묻어 내려앉는다.

 

나무 잎에 묻어난 시간

세월을 다루고

인생에 묻은 시간 세월을 다룬다.

인생에 앉은 세월

세상을 어루만지어

둥글둥글 세상을 논하더니

시간이 너그럽지 안구나

 

하나둘 물들어 조탁하는 나무 잎

바람처럼 왔다가는 인생 인 것을.

 

 


 

 

김려원 시인 / 머리칼

 

 

 머리칼은 체내의 감정

 일일이 챙기지 못해 질끈 묶지

 때때로 지지고 볶는 일로

 뜨거워진 바닥이 들춰지지

 

 어느 날 한가득 바람이 들면 올올의 칼, 머리의 칼, 그 속에 손가

락을 집어넣고 수많은 칼날을 쓸어 넘기지.

 

 날을 품은 미세한 길들이 비의 전주처럼 공중에 흩날리지.

 

 털은 소름의 일가붙이들,

 칼을 최초로 찾아내는 감각이지

 

 청회색 새벽이 눈뜨는 소리, 얼었던 빨래가 햇살을 잡는 기분 혹은, 젖은 허공을 뚫는 감자 싹의 독기 같은 것. 머리털은 그러나 나에게서 가장 먼 바깥의 감정, 사는 동안 셀 수 없이 잘라내고 잘라내지. 단 한 올도 아프지 않은 감정을 끊어야 하지.

 

 내 귀에 가장 가까운 말과 먼 말은 털에게 물어보면 알지. 단 한 올 도 아프지 않은 감정을 답해야 하지

 

 털은 그래서 체외의 감정

 거짓말을 분류하는 손의 감정.

 

-《애지≫ 2018년 겨울호

 

 


 

 

김려원 시인 / 옆구리는 시리다

 

 

 그러니까 너는 옆구리다. 시린 옆구리라는 식상함을 생각 하겠지.

 

 복사꽃 핀다. 복사꽃의 옆구리는 구린내가 난다. 그때부터 옆구리는 구린 것이다.

 

 어머니의 구리반지는 녹슬어 전당포에서 사라진 지 오래, 전당포도 오래전 사라졌다.

 

 옆구리는 옆에 선 사람의 옆구리 옆에서 구리다. 구리는 금속알레르기보다 강하다. 금속알레르기는 금보다 강하다. 나는 네가 준 금반지도 못 낀 사람.

 

 못 끼는 사람이 옆에 앉는 건 못마땅하다. 선로보수작업구간을 천천히 지나가는 열차는 철로변 개나리만큼 마땅하다. 열차에서 옆구리를 내어준 사람은 지금껏 구리고 사람과 비슷한 사랑의 발음은 온통, 사랑을 말하는 사람의 옆구리처럼 간지럽다.

 

 아직까지도 너와 나는 옆구리만 비비적대고 있다....... 거짓말쟁이들,

 

-『변방 33집

 

 


 

 

김려원 시인 / 포지션

 

 

당신은 가까운 만큼 멀었다

둥근 탁자가 있는 방에서

 

포지션만큼 파시즘만큼

봄만큼 오리엔탈리즘만큼

신문기사만큼

 

보험회사편지봉투 절취선이 울퉁불퉁 뜯겼다

 

쪼그려앉아 담배를 피우는 베란다가 빗소리만큼

고양이울음이 고양이만큼

 

일일드라마에서 콩나물머리를 따는 여자가

멸치똥 빼내는 나를 보며 웃는다

 

보험회사봉투 이름이 울퉁불퉁했다

 

떠나간다는 말보다 접어둔 이야기가

 

당신은 멀었다 둥근 탁자가 있는 방에서

 

 


 

 

김려원 시인 / 적록색약 띄어 읽기

 

 

지구는 대기권 밖에

더 빛나고 비좁은 빛을 둔다.

꼭지는 알겠지만 사과는

제 바깥에서 벌어지는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고

악천후에도 이불 속 솜은

늘 맑은 구름이 펼친 뭉게뭉게의

잠을 예감한다.

 

구름의 배후는 사과꽃받침만큼 잘 기워진

한 채의 이불,

기하학적 무늬들은 구름이 흩어져간 영역까지 불러들여

일관되게 붙어있다.

 

변할 까닭을 모르겠다는 단단한 낯빛으로

캡을 눌러쓴 신호등이 푸르고 노랗고 붉다

그러면서도 익지는 않는 것이

내 어머니의 한탄과 닮았다.

 

손에 들었을 때와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달라지는 사과 색깔을 오물거리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다투는 일은

잘 기워진 한 채의 이불을 뜯어내는 기분이랄까

어머니가 별불가사리 심사로

총총 다져온 홈질을

쪽가위로 예리하게 자르는 기분이랄까

 

푸르다가 노랗다가 붉어져온 어머니가

뭉게 한 땀 뭉게 한 땀 일몰을 깁고 있다.

 

 


 

김려원 시인

1966년 경남 하동 출생. 경상대학교 졸업. 2017년 《진주가을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천년에 아흔아홉 번>. 랜선시집 <처음처럼 대작>. 현재 <변방>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