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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순례 시인 / 마흔을 기다렸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1.
함순례 시인 / 마흔을 기다렸다

함순례 시인 / 마흔을 기다렸다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 있다

알 수 없지만

내가 가고 있으니 구름이 오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빗속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고등어처럼 푸릇했으나 파닥거리지는 않는다

추녀에 매달려 울던 빗방울들이

호흡을 가다듬는 저녁 다섯 시

점점 켜지는 불빛들 바라보며 묘하게

마음 편안하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

방점을 찍는다 그 옆에 사랑은 세숫비누 같아서

닳고 닳아지면 뭉치고 뭉쳐

빨래비누로 쓰는 것이다,라고 적어놓는다

저 구름을 인생이라 치면

죽지 않고 반을 건너왔으니

열길 사람 속으로 흘러들 수 있겠다고 쓴다

마흔, 잘 오셨다

 

 


 

 

함순례 시인 / 담양(潭陽)

 

 

길을 냈네

나는 왜 누가 내놓은 길만 따라왔는지

내가 이 겨울 산골에 들어온 건

사랑을 놓치고 사랑에 서러워서였네

무덤이나 농지에서 끝나버리는 길

능선 너머로 잇대어 보고도 싶었네

죽어서 가는 곳은 무덤뿐 아니니

사람이 밥심만으로 살아지는 것 더욱 아니니

 

나의 무기는 일심 깡다구였네

거친 나무 걷어내고 덤불가지 쳐내며

적막강산에 구부러진 두 손 내밀 때마다

바람이 붉게 붉게 울었네

몸집 큰 산꿩은 팽팽한 봉인을 풀고는

늑골에 고여있던 그늘을 베어물고 사라졌네

 

햇살 한 평

햇살 두 평

숲 가운데 오솔길이 구불구불한 등뼈 드러내며 삼삼했네

누구와 이 길을 걸을까

따순 볕이 가슴까지 차올랐네

 

하, 담양이었네

 

 


 

 

함순례 시인 / 봄날, 라 보떼가 델 아르떼

 

 

꽃을 품고 다니는 사람을 만났어 그러니까 봄비 부슬거리는 오후, 봄이 다가오는 소식에 들른 찻집에서였지 오래된 축음기와 전축이 찻집 구석구석을 날름거리는, 그래 봄이 오는 노랠 듣고 또 듣고 있는데 아직은 먼 봄빛 거느리고 그가 들어왔어 양귀비꽃 한 아름 싸안고....... 글쎄 신문지에 둘둘 만 꽃을 본 게 얼마 만이더라 말로만 듣던 꽃을 보는 경이로움일까 유리병에 꽂아놓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있는데 그이 다시 차에 갔다 온 모양 신문지에 둘둘 만 꽃을 내게 안기네, 아네모네! 오늘 참 운수 좋은 날이야 그림을 그린다더니 정작 사람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었어 당신도 기대해도 좋을 거야 노은 은구비 공원 근처 찻집에 가면 전생에 꽃씨 종족이었을 종자 퍼뜨리는 일에 살짝 이쁘게도 미친 그 여자, 혹 만나실지도

 

 


 

 

함순례 시인 / 숲

 

 

 오래된 편지를 읽습니다 당신에게로 갔다가 우리 속에 놓여진 편지 당신을 만나 즐겁다, 쓰여있군요 행복해요, 라고도요

 가까이 있으면 자랄 수 없다는 듯 간격을 두고 발끝 세운 나무들처럼 큰 바람이 일렁일 때나 사르락 손 내미는 이파리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곁눈질로 골똘했지요 이따금 새들에게 눈 맞추는건 헛김나는 일이어서 나는 그만 아득해져 혼자 말갛게 익어가는 산감이 되었더랬지요

 그런데 묘목을 심은 첫 자리 뱀처럼 얽혀 있는 우리의 뿌리를 만납니다 나의 밑둥 썩은 감꼭지 핥고 있는 이가 바람이려니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벌거숭이 산길에 가위눌리는 일도 끝이지 싶네, 내게로 온, 오늘 문득 층층이 허물 벗은 골짜기 따라 우거진 숲을 읽습니다

 

 


 

 

함순례 시인 / 숨어있는 동굴

 

 

엄마의 입안에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동굴이 있다

 

어느 날 수저질 느슨한 엄마

고기를 씹지 못하신다

고름 뿌리로 남은 이, 하나 둘 셋,

 

빛도 바람도 없이 습기만 눅눅한

십수 년 불 들이지 않은 검은 아궁이

그 깊은 자궁을 들여다 본다

 

청상 시절 중심이 흔들릴 때 있었다

털어놓으시던 엄마

차암 의젓한 이였는데, 차마 니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풀이 자랄 수 없는 동굴

허나 칠남매는 엄마의 살을 뜯어먹고 자란

육식동물이었으니

 

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 맛나게 드시고 가시요!

나의 완력에 뿌리 뽑아낸 엄마

비로소 곤한 잠에 드신다

 

내가 발견한 동굴은 고작 세 개뿐

몸 어딘가 숨겨놓은 동굴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함순례 시인 / 혹시나

 

 

마흔 지나자 내게도 손님이 찾아왔다

위아래 사이좋게 나란히

그러나 본래 악한 녀석들은 아니라 하니

잘 모시고 잘 사귀어 보기로 했다

손님들도 때로는 기침 큼큼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발자국 소릴 냈다

유방 한쪽이 찌르르-

예리한 날에 찔린 듯 아파온다거나

종종 허리가 시큰 아랫배가 묵직해지곤 했다

내 안에 무언가 돋아나 단단해지고 있다는 거

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내생의 환幻들이다

또 다른 세상과 눈 맞출 궁리나 하면서

새끼 치고 싶은 욕망에 들끓는 짐승처럼

사십여 년 내리 굴려온 몸이

이제 나를 부리고 가겠다는 신호

혹시나, 우주 너머

잃어버린 나에게 건너가는 환지통은 아닐까

꾀병과 엄살을 섞어 시시로 날 주저앉힐 때마다

갓 태어난 아가 어르듯

행동거지 조심해졌다 말투 더욱 겸손해졌다

멀리 계신 엄마에게 전화하는 날 많아졌다

 

 


 

 

함순례 시인 / 뺨

 

 

내 친구 윤태자, 언젠가 그녀의 뺨을 갈겼다 내 궁색한 자취방에서 한 일 년 식객노릇을 했는데 새벽별만 바라보아도 배터지게 슬펐던 그 시절, 우리는 불어터진 라면발처럼 톡톡 끊어지기도 하고 가지런히 단추를 채우기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서슬 푸른 적의를 키우기도 했다

 

내가 직장으로 야간대학으로 돌아치는 동안에도 밤고양이처럼 웅크려 있기 일쑤였던 태자가 경찰시험에 붙은 날, 그날 밤 나는 태자의 뺨을 철썩, 올려붙였다 "가시나! 민중의 지팡이 노릇 똑바로 햇!" 그때는 임수경이 평양축전에 참가한 즈음이었는데, 그녀와 외양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조차 아예 짬새 똥파리쯤으로나 여긴 경찰이 아니꼬와 괜한 화풀이 한 것이다 그 밤의 손꽃.

 

결혼하고 하나 둘 새끼 낳고 이제 헐렁한 나이, 모처럼 한 방에 눕는다 태자가 말한다. 수많은 민원인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 뺨 얼얼하다고....... 내 친구 윤태자! 누가 뭐래도 늠름한 민중의 지팡이다

 

어느새 고단히 잠든 태자의 뺨을 쓸어본다 내 뺨, 온통 얼얼하다

 

 


 

함순례 시인

1966년 충북 보은 출생. 한남대 영문과 졸업. 1993년 《시와 사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뜨거운 발』 『혹시나』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울컥』.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아름다운 작가상'(18회). 현재 '작은詩앗 채송화' 동인으로 활동, 대전작가회의 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작가마당> 편집위원, <애지시선>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