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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신 시인 / 좋아하는 곳으로
∞ 늘가던 그곳으로 가 강물이 흘러서늘좋은 곳으로
거기창밖 너머 플라타너스,강가 옆 수양버들, 앉아 있는 사람들 웃음소리 반짝이는 곳으로
사뭇 다른 마음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숨 한 번 고르면서 생활을 곧추세우고 바라보는1940년생 소녀가
좋아하는 곳으로
† (앙상한 검은 얼굴의 늙은 여자. 의자에 걸쳐진 외투처럼 졸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 얼마나 다행이야 무엇이 다행인지도 모른 채 노래를 하네
노인들은 죽고 싶어서 울고 자식들은 살고 싶어서 울고 저 강물은 어디로 가는지 바쁘게도 흘러가네
어떤 꿈을 꾸나요,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그녀의 석류나무,그녀의 덩굴장미는
∞ 언제 윤슬에 오래 누워 볼까요
나의 어린 어머니
-시집 『롤랑을 기억하는 계절』, 끝과 시작, 2023.
김명신 시인 / 는개구락부
는개가 찾아오는 날엔 오래 기다려야 한다 대답이 없다고 서둘러 부르거나 발길질을 해대도 소용없다 무겁고 어눌한 눈들이 날카롭게 베고 지나가도 는개는 말짱하다 간혹 먹잇감을 향해 어슬렁거리는 늑대처럼 부라리는 눈동자를 만나다 해도 금방 순해지는데 이때는 외출을 삼간다
어린 땅꾼들은 는개 속 풍경을 마련하는 중책을 맡는다 어쩌다 칭찬을 듣는 날엔 장례행렬처럼 길고 아득한 산길에서 축축한 콧노래를 밤새 부르며 공포를 등에 업고 행여 차여 넘어지더라도 가장 깊숙이 내려앉기를 주저 않는다
학교 종소리에 회초리가 개입할 때야 어린 땅꾼들은 말 잘 듣는 학생이 된다 교문을 통과하는 여러 마리의 늑대개, 어수선한 몸부림이 저마다 숨겨놓은 곳에서 기상한다 는개가 키워낸 어린 땅꾼들의 살림살이가 학생부실 앞 땅 속에 묻혀 있다 누구는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영악해져 간다고 하고 누구는 병든 아버지들이 살아난다고 기특해한다
는개가 진득하게 내리는 시간엔 소문도 쑥쑥 자란다 학교 게슈타포 학생부장 선생의 뱀눈이 정찰을 시작할 때마다 그의 귀가는 빨라지고 내비 속엔 여러 아이들의 얼굴이 형체를 잃었다 얻었다를 반복한다 한 번 게슈타포의 대뿌리에 피멍이 들어본 아이들은 메두사도 두렵지 않을 학생부장의 머리를 기대하고 있다 거짓말처럼 학생부장의 온몸엔 어린 땅꾼들의 주먹만 한 멍이 저승꽃으로 피어났다
멀리서 마을이 세수하는 소리가 나자 학교 종소리는 어린 땅꾼들을 토한다 막대기를 휘저으며 습한 콧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귀가를 서두르는 는개 새로 계획한 작전을 엄숙하게 수용하며 고요한 잠에 싸늘한 뒷덜미를 맡기며 하나 둘 마을을 지워나간다
김명신 시인 / 우산
비와 비 사이에 비는 한없다 나와 나 사이에 나는 또 한없다
비와 비 사이에 나는 또 드러나 우산 쓰는 일이 이젠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우산은 내게 속해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사람들은 내게 우산이 없다는 것과 우산을 쓰지 않은 일에 대해 늘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비를 맞는 일이 얼마나 인간적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축축하게 젖은 나는 늘 그렇듯이 알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눈물찌꺼기와 중력의 법칙에 순순히 따르는 추욱 처진 나는 칠순을 막 넘겼다 사실 이대로 나는 다섯 살 여자아이가 될 수 있고 이제 막 초경을 경험하는 소녀도 될 수 있고 가슴 떨림에 잠 못 이루는 스무 살 처녀도 될 수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빗속을 뚫을 때 안다 바늘 같은 빗줄기 사이사이로 말갛게 씻긴 말랑말랑함은 처녀요 에디션넘버를 갖지 않을 원본이요 차마 만져볼 엄두도 낼 수 없을 이생에서 큐브 한 조각임을
김명신 시인 / 손가락
1 나는 마다카스카(Madagascar)에서 왔다
2 교태로운 손이 술병을 만지면서 손가락을 여러 개 만들기 시작했다 손가락들은 알아서 자치구역을 만들더니 흐물거리는 것들은 모두 건드려 본다 제일 길다란 손가락이 눈을 크게 뜬다 술잔이 출렁거린다 여자다 머리카락이다 슬그머니 타 내리더니 앞가슴으로 파고들어가 수작을 한다
흥건한 피가 술잔 속으로 스민다 달짝지근하다 잘도 넘어간다 순간 알렉스의 눈빛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고프다 참지 못한 알렉스는 마티의 선홍빛 엉덩이를 얇게 썬다 핑그르르 입맛을 다시는 눈살을 손가락이 잘리는지도 모르게 달콤하다 얼굴을 턴다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입술에서 가슴골을 타고 내려와 술잔에 스민다 둥둥 손가락이 술병 속에서 나부낀다
3 본성은 수성獸性이다 알렉스에게 마티는 본성이자 수성이자 이성이다 수많은 손가락 수많은 젖가슴이 둥둥 떠다닌다 시방 세계에서 날름거리는 혀를 쉽게 본다 맛을 보지 않고도 신선함을 알고 있는 눈들을 본다
머리는 이성과 감성을 숨겨두었다 필요에 의해 둘은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은 이 둘의 존재가 인식되지 않은 채 잘 조합돼 드러날 것을 기대한다 머리가 지혜를 입게 된 시간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나는 마다가스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잊고 있다 어쩐지 방법을 찾지 않기로 했다
*마다카스카(Madagascar) :아프리카 동안 인도양에 위치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20만 종에 이르는 토착 동식물의 3/4이 희귀종인 까닭에 ‘희귀생물이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알렉스와 마티:드림윅스사가 만든 <마다가스카>에 나오는 사자(알렉스)와 얼룩말(마티)이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사자 알렉스가 친구 마티의 엉덩이를 보며 고기를 생각한다.
-<詩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김명신 시인 / 봉지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네가 건넸다 그는 손대신 봉지를 쥐었다 폈다 해서 나중엔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봉지의 크기나 재질 그리고 내가 마련한 건지 그가 준 것인지도 봉지는 손 혹은 관계 주물럭거릴 매체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 자리는 기억나지만 그 장소는 어떻게 찾아야하고 그것을 챙겨왔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다만 그가 오늘 전화해서 그 봉지는 잘 살펴보았냐고 물었을 때 어정쩡한 답으로 다급하게 화제를 바꿔버렸다는 걸 기억한다
- 2018, <한국동서문학> 봄호
김명신 시인 / 연두 빛깔 버스가 오고 있다
연두 빛깔 버스가 오고 있다. 산바람을 꽁무니에 달고 멈춰선다. 아직 사람은 없고, 전봇대와 가로등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슬슬 한두 사람 버스에 오른다. 아직 목을 따뜻하게 감싸야 한다. 버스는 출발을 알리며 시동을 건다. 붉게 달아오른 버스를 향해 한 사람이 뛴다. 버스도 사람도 모두 숨이 차다. 이제 버스는 덜 깬 들과 빈 도로를 휘휘 돌아 도심으로 달릴 것이다.
아침의 꿈틀거림을 오래 상상한다. 우유라도 한 잔 했을까 아까 그 사람들. 엊그제 사온 보리로 된장을 풀고 한소끔 끓이고 갓 지은 가마솥 밥 한 공기를 올려놓는다. 따뜻한 하루를 위한 영원의 밥상이다. 봄이 이런 것이리라. 누구나 꽃으로 만개하고, 누구나 등이 따뜻할 것이다. 누구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인이 되어 온몸이 발개지도록 꽃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 바람은 마땅한 시어를 찾아 헤매는 노시인의 유년에 대한 기억으로 활짝 웃거나 가슴을 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 물을 것이다.
“시간은 왜 이리 잘도 가지요?” 산바람이 들어와서 빠져나간다. 손을 내어 바람을 감각한다. 보드랍고 미지근하고 달고 연하다. 산 너머 숨어있는 무동 신도시. 오늘도 이삿짐 올리는 소리, 엘리베이터에 붙은 광고 전단지가 산바람에 휘날릴 것이다. “안녕하세요. 801호입니다.” “안녕하세요. 702호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짧은 인사를 나누며 낯을 익힌다.
1층에서 우린 아는 사람들이 되어 다시 또 인사를 한다.
겨울 저쪽에서 봄 이쪽으로 이사 왔다.
눈 닿는 곳 손 머무는 곳에 산이 있고, 거기 춘설이 앉아있다.
우리는 아직 통과중이며,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아직 많이 늦지 않았다.
김명신 시인 / 호명
발터_로쟈_롤랑_꼬나_꼬두_꼬세_꼬네_꼬오_초검_민트_크림_벨라_테오_피나_빌리_릴리_라이언_타샤_뮬란_막시무스_수박_레몬_망고_메론_로즈_호랑이_여우_녹두
비스듬히 누운 이름들은 모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갔지만 한 번 이름을 부르게 되면 발터에서 녹두까지 부르게 되고
각자의 이름에 화답하듯 일렬로 와 앉기도 하고 숨어 버리기도 하고 어디선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없는 아이들을 불러오는 듯도 하고
죽은 새들은 죽은 사실로 살아가는 새들은 움직임으로
각자의 숨을 놓을 때까지
―시집 『롤랑을 기억하는 계절』에서
김명신 시인 / 롤랑을 기억하는 계절
0 어느 순간 살아 있다는 감각을 모를 때가 있는데요,
아무 이유도 없이 자살해 버린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1 롤랑은 베란다 건조대 철문 모서리 위에 앉아 있다 갑자기 허둥지둥 날아다녔다. 핏방울이 철문으로 튀겼고 다른 앵무들이 함께 놀라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롤랑도 어쩔 줄 몰랐다. 그때 롤랑은 매우 높은 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마홍 가슴으로 와 헐떡이는 롤랑의 몸은 더없이 작았다. 호기심이 많은 롤랑은 하필 마홍이 열어젖힌 안쪽을 들여다보다 닫히는 문에 부리가 깨져 버린 것이다.
치명상이었다. 그날 이후로 발터는 롤랑 곁에 오지 않았고 마치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어떤 냉정한 기운이 감돌았다. 롤랑은 그러든지 말든지 혼자의 시간을 더없이 명랑하게 보내고 아기 앵무들도 살뜰히 살폈다. 다행히 마홍 주변에서 놀거나 좋아하던 나무로 가 몸의 열을 식히며 쉬기도 했는데, 어두워지면 마홍의 어깨로 와 있다가 손안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사고 3일 후 바깥나들이를 하고 돌아온 롤랑은 결국 영원한 잠 속에 빠져들었다.
여름 뒷산은 새들이 놀기 좋았고 롤랑은 마홍이 즐겨 산책하는 언덕의 소나무 아래 묻혔다.
2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롤랑에게 괜스레 이 말이 한숨처럼 나오네요.
베드로, 당신은 이런 날 요안나 콘세이요의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를 펼치다 깃털을 발견하고 소리 내어 읽어요. 깃털을 만지는 감촉을 배경으로 깔고 아주 천천히.
어떤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로 와 입김을 내뿜고 있다는 걸 누구도 알아챌 만한 계절이 왔어요.
한 장을 넘기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롤랑, 롤랑이 와 있었구나.
넌 또, 새가 되었던 거니?
*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시집 『롤랑을 기억하는 계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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