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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인원 시인 / 도서관 간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1.
이인원 시인 / 도서관 간다

이인원 시인 / 도서관 간다

 

 

질기고 긴 문장 붕대로 꿈틀대는 그리움을

꽁꽁 殮해 두러 간다

 

과월호 잡지 신세 같은 쓸쓸함을

훌훌 거풍시키러 간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깨서 보채는 외로움을

고문서보다 깊은 잠재우러 간다

 

머릿속에 빼곡한 '너'라는 낱말을

모조리 삭제하러 간다

 

고전이 되지 못할 내 비밀을

고전 속에 암호처럼 밑줄 그어두러 간다

 

끝내 못 다 읽은 어떤 사랑이야기를

아쉽지만 기일 반납하러 간다

 

온갖 잡다한 사연 다 끌어안고도 의연한 도서관을

눈곱만큼이라도 닮으러 간다

 

 


 

 

이인원 시인 / 밤비

 

 

귓바퀴 어름이 포근하다 했는데

어느새 발끝까지 따스한

봄볕인양 곱게곱게 내리는 저 밤비 소리

아직 잠 못든 귓속으로 고여들고 고여들어

분홍 클리토리스만한 네 말을 건드리고 또 건드리고

 

흐느끼는 연인을 달래 듯

봉분 하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비단풀잎 같은 저 밤비 소리

아직 잠못 이룬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스며들어

분홍유두만한 네 생각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이인원 시인 / 관문체육공원

 

 

 텅 빈 응원석 계단 아래 검은 개 한 마리 묶여 있다

 

 푸른 소매를 걷어 올린 밤의 피부와 경계가 없다

 

 개의 검은 털이 밤의 피부로 이식되고 있다

 다행히 여름밤의 모공은 활짝 열려 있어 이종異種간의 모낭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데

 

 개는 주인의 마지막 한 바퀴에만 온정신을 쏟고 있다

 8번 트랙에 묶인 주인은 제 목줄의 반경을 뱅뱅 돌고 있다

 주인 그림자 뒤를 따라 걷는 개의 시선은 너무 빠른 보폭을 조정하느라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마침 관악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수천 년 우주의 주인을 기다린 거대한 검은 개의 체취가 묻어 있다

 

 예민한 후각으로 서로를 감지한

 목덜미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능선이 많이 닮았다

 

 죽을 만큼 안전한 산의 이름으로

 없는 목줄에 매여 부르르 몸을 털 때

 

 마침내 트랙에서 풀려난 주인

 까만 색종이 바탕에서 애견의 윤곽을 정확히 오려낸다

 

 응원석 한 귀퉁이에 버려진 색종이조각

 검은 개를 졸졸 따라가다가 길고 긴 바람의 목줄에 이끌려 더 새까매져서 되돌아온다

 

-『문학청춘』 2019-여름호

 

 


 

 

이인원 시인 / 배달

 

 

장바구니 속에는

우유 1팩과

계란 10알

나머지는 모두 배달시키고

가벼운 장바구니와

가벼운 걸음으로 걷는데

 

바람이

온 동네방네로

라일락 향기를 배달하듯

배달 제한 품목이 없는

머릿속으로 문득

어릴 적 동화 한 편이 특송 된다

 

어느 새

닭 1000마리와

젖소 100마리가 커가는 푸른 목장을

너끈하게 이고 가는 내 그림자를

탈, 탈, 탈, 노란 스쿠터 소리를 내며

바지런히 배달하고 있는 하오의 햇빛

 

안주머니 속에 곱게 간직한 연애편지처럼

장바구니 그림자 속에 든

우유 1팩과

계란 10알도

원작 동화와는 다르게

덤으로 안전하게 배달되고 있다

 

 


 

 

이인원 시인 / 금혼식

 

 

겨울 오후 서너 시쯤의 햇빛

 

그것도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눈부시지도 따끈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햇빛 아래,

 

나란히 걸어가는 등 뒤로 얹히는

 

까칠한 손바닥 같은

 

딱 그만큼의 온기로 갈 것

 

발걸음 곱다시 받아주는

 

좀은 쓸쓸한 낙엽 길로 돌아갈 것

 

낙엽 밟는 소리 하나하나 다 읽히는

 

딱 그 정도의 속도로 갈 것

 

 


 

 

이인원 시인 / 해학諧謔

 

 

방금

초록 잎사귀 위로 살짝 내려앉은

한 점

칠성무당벌레 같은

 

화려하고

고급스런 브로치 하나

 

자칫 진부해 보일 수 있는

무거운 진정성의 正裝을

단번에

경쾌하고 세련되게 바꿔놓는

 

 


 

 

이인원 시인 / 장작

 

 

젖꼭지만 까맣게 밀라붙은 어머니 가슴처럼

쩍쩍 금이 간 결마다 귀를 대본다

되직하게 풀 먹여 바싹 말린 이불 호청 서각 이는 소리

꽉 조였던 슬픔의 좁은 솔기 터지는 소리 들린다

 

햇볕을 착착 아귀 맞게 접어놓고

수천 번 다듬이질로 갈무리할 줄 알았던

그 시절은 이미 전설이 되었고

없어진 그늘 자리 같은 서늘한 기운만 남았다

 

완벽한 오체투지

세사에 젖지 않고 마를수록 저렇게

가볍게 자기를 던질 수 있음을 본다

 

 


 

 

이인원 시인 / 계속 섭섭하겠지만

 

 

서로 섭섭하다 여겼기 때문에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겠지

 

뜬구름 같은 말이 비가 되어 내려도

한 생각 오래 젖었고 한 생각 금방 건조해졌다, 단정하는 것은

바짝 말라비틀어진 생각

 

우산을 받쳐도 더 축축해지는 시간과

비를 맞아도 쉽사리 안 젖는 기분이 있다

 

같이 나란히 걸어도

우산 밖으로 나온 젖은 어깨의 감정까지 드라이클리닝 되지 않는다

 

우린 조금 울었다, 함께 전쟁영화를 보고서

 

뭉클했던 한 장면을 떠올리며

한 울음 오래 축축했고 한 울음 금방 그쳤다, 착각하는 것은

곰팡내 나는 눅눅한 편견

 

영화가 끝나자 바로 종전되는 전쟁이 있고

포화 속에서 영영 빠져 나올 수 없는 전쟁도 있다

 

일상이 전쟁인 현장과 영화로만 전쟁을 학습하는 뽀송한 일상

같이 울었어도 눈물의 성분이 다를 수밖에

 

하루 다섯 차례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전쟁에 누가 매번 독같은 눈물을 흘릴까

 

그러므로 우리 계속 섭섭하겠지만

참전은 각자, 오늘 한 번으로 끝내자

 

-『문학과창작』 2022-가을(175)호

 

 


 

이인원 시인

1952년 경북 점촌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19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에 살을 베이다』 『사람아 사랑아』 『빨간 것은 사과』 등. 2007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