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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시인 / 붉고 둥근 사과 반쪽
사과 한알 붉고 둥근 것의 중심을 향해 우리는 마주 앉는다. 그것은 처음부터 둘로 나누기 위한것 나는 당신을 닮아간다 사과는 우리를 남은 당신과 당신이 건넨 또 다른 나로 나누고 우리는 애써 둘이 된다
당신은 웃으며 둘로 나뉜다 당신과 내가 나누어 가진 서로의 뒤통수처럼 우리는 웃으며 또다른 하나가 되어간다.
나는 언제나 반짝반짝 윤이 나는 붉고 둥근 것의 중심을 나누길 원하고 우리는 늘 똑같이 당신과 나로 나뉜다
박선경 시인 / 오후 세시
뻐꾸기 한 마리 門을 열고 나온다 벽에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모양은 門이다
햇살은 방안에 그림자를 남기지 않고 기울던 시계방향이 수평위에서 일으켜 세우는 허기 文法도 時法도 없다
골목을 지나는 푸른 트럭이 오고 할 일 없이 거니는 청년이 있고 알아볼 수 없는 상자들이 오고 가는 동안 나는 굶주린 뻐꾸기처럼 창문을 열고 날지 못하는 숫자 3의 습관에 대해 생각한다
머리 몸통 다리의 습관을 가진 나는 이야기의 처음일까 사랑의 끝일까 푸른 트럭이 사라진 골목 끝에서 아이들이 달려온다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는 상자들처럼 생략 된 이야기의 처음이 되거나 결말에 이르지 못한 오후 세시 골목의 풍경은 생각의 틈에 끼어있는 습관처럼 머리로 자란다
오후 세시 나의 머릿속에서 숫자3은 門을 열고 나온다 머리로 날아가려는 숫자3의 모양은 問이다
박선경 시인 / 사물의 겹침
-나는 평생 동안 질투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어. 질투심이 상상력보다 먼저야. 질투심은 시선보다 더 강렬한 환영이지.-파스칼 키냐르
사물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마음 속 사과는 얼마나 멀고 얼마나 푸르고 딱딱한 사물인지 그려지지 않는다 사과는 달다 사과는 붉고 부끄럽다 동시에 행간과 행간 사이를 빠져나가는 사과를 갖고 싶다의 욕망
사과를 그리는 것은 소리를 길들이는 것 사과라고 속삭이듯 나는 바라본다 오전 11시의 빛이 물결처럼 그림자를 만들고 오직 빛으로 더듬어가는 오전 11시의 사과는 시간이다 잉크가 스며든 동판 위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처럼 보이는 것은 흑과 백의 바깥에서 온다
사과를 알아보려는 나는 사과를 질투한다 당신의 사과 사과를 베어 문 당신 그리운 사과 박스 안에 갇힌 시선 무심한 사과는 달다 사과는 붉고 부끄럽다 동시에 행간과 행간 사이를 빠져나가는 사과를 갖고 싶다의 욕망 사과와 나는 영원히 포개어지지 않는다
박선경 시인 / 이방인
우리는 이렇게 남이 되어 간다
서로의 내부를 훤히 비추듯 전등 아래 마주한 몇 마디의 대화처럼 세월의 간지가 만든 형형색색의 집들이 마주한 골목 각양각색의 허름한 외장재를 입은 건물의 내부로 더러는 빛이 바래지고 몇몇은 흘러간 세월의 뒤편에서 허물어져 가는 골조에 기댄 채 그의 얼굴과 나의 표정에 흐르는 물소리 낡은 벽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처럼 우리는 교대로 센서 등을 밝히며 말없이 귀가한다 우리는 가끔 베란다에서 서로 너무 가까이 있었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얼굴을 숨기고 계단은 깊으나 나란히 걸을 수 없도록 통로는 좁다 우리들의 조심스러운 속삭임은 창밖 굴삭기 소리 따라 멀어지다 밤이면 발아래 전등 스위치를 올린다 아침엔 등을 맞댄 채 식사를 하고 퇴근길 골목 낡은 레스토랑 안에선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한다 낮은 천장 벽 아래 조용히 전등의 불빛을 낮추는 사람들 창밖 허물어져 가는 당신의 뒷모습에 조용히 창안의 커튼을 치는 월요일 나는 자연스러운 이방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시와문화》 2019. 가을호
박선경 시인 / 그 빵집, 비탈에 서성대는 이유
비탈길, 그 빵집은 발아를 꿈꾼다 덩굴식물이 기어오른다 빵 굽는 시간 오전 일곱 시 발밑으로 난 창 안의 흰 손이 분주한 신호를 보내오는 시간 엇갈리는 손등 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열 손가락은 창틀을 넘어 벽을 더듬어 오르는 담쟁이덩굴,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휘어진 허리께로 서서히 차오르는 구수한 냄새 비탈길 푸른 잎의 구릉이 된다 그곳에 나의 뺨과 오른쪽 귀를 파묻고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는 것 내 겨드랑이 밑에서 날아오르려는 새 떼들의 소리 그것은 그 집 앞을 서성대는 이유이다
박선경 시인 / 포옹
포옹에는 낮고 둥근 소리의 음역이 있지 얼굴과 얼굴을 파묻고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닌 단지 하나의 음이 되었을 때 잘 빚은 어둠 불룩해지는 항아리 둥글게 포개어진 우리의 포옹은 고통인줄 모르고 괄호를 열지 마주선 거울의 매혹처럼 빈자리를 채워가는 컴컴한 뒤통수들
박선경 시인 / 그녀의 문장
그녀의 접속사는 생략되어 있지 그녀의 행동은 언제나 시간을 압축하고 그녀의 문장은 언제나 시간을 함축하지 주름의 안과 밖 해독할 수 없는 평면의 거리 나는 그녀의 행동 사이사이에 접어놓은 문장 속에 있지 첫 번째의 그녀에게서 두 번째의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서서 사랑해 라고 속삭이며 내딛는 한쪽 발과 낯선 그녀의 얼굴에게로 다가서려는 한쪽 발 사이에서 생략된 접속사 그러나 그녀는 거울 속 반대로 접힌 시간의 안 쪽 펼치자 또 다시 한 칸 올라서는 그녀는 떠나고 없네
그녀의 접속사는 그녀보다 느리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녀가 방금 도착한 나의 문장 위로 사라져갈 때 그녀의 다리 사이 아득하게 쏟아져 내리는 계단 아래에서 지금까지 써내려간 나의 문장은 언제나 그녀의 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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