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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영 시인 / 별꽃뿌리이끼
나를 탁본해 보실래요 이끼는 이끼인데 별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꽃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뿌리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나를 현미경으로 보실래요 꽃이라고 하면 꽃잎도 있고 꽃받침도 암술도 씨방도 다 있지요 다시 한번 관찰해보실래요 내 몸엔 달걀이 두 개 있어요 배와 등에 말이에요 이빨도 두 개 있다니까요 아무것도 씹을 순 없지만 뿌리, 뿌리는 아마도 못 찾으실거예요 소리 없이 웃고는 있어도 속 깊이 울고는 있어도 도대체 눈물을 모르는 내 모습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고 살다 보니 눈물샘이 다 말라버린 별꽃뿌리이끼 여기 있어요
-시집 <별꽃뿌리이끼>에서
이아영 시인 / 불두화佛頭花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오르는데 옆 눈짓하는 이 누구인가
곱슬곱슬 파마머리 은빛이슬 머금고 촉촉한 눈빛으로 날 보는 이 누구인가
언젠가 한번쯤 본것 같기도 한데 푸른 손바닥을 연거푸 흔든다
숨가쁘게 오르는 가파른 길손, 어쩌자고 날 부르는지
내려갈 때 보자고 손사래 친 나에게 적멸보궁이 여기라며 자꾸만 바짓가랑일 잡는다
이아영 시인 / 일출 속에 - 생명의 신비
앞산이 살아났다 연두색의 엷은 이불을 덮고 아기 숨결처럼
죽은 듯 숨죽여 하얀 이불 쓰고 가슴속에 얼음덩이 끌어안고 동장군 견디더니
부드러운 봄바람에 깨어나고 봄비가 젖줄 되어 아기손이 꼬물꼬물 기지개를 켠다
빈 가지를 겨우내 지켜주던 새 둥지도 푸른 잎에 가리워 포근히 쉬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생명줄이 흐르듯 메마른 가슴에 떠오르는 영감의 줄기 타는 듯 한 일출 속에 끝없이 솟아오른다
이아영 시인 / 예약 미용실
그곳에 가면 마스크 쓰고 비닐 모자까지, 덮어쓴 할머니 대여섯이 앉아 있다 모처럼 외출이니 수다를 떨 만도 한데 약속이나 한 듯이 묵언수행 중이다
파마냐? 염색이냐? 커트냐?
미용실 주인 선창을 따라 한두 마디 하고 나서 또다시 명상에 빠지기, 참선에 빠져들기 하나 같이 일자(一)로 입 다물고
가부좌는 틀지 않아도 된다 앉거나 서 있거나 가끔은 기지개는 켜도 된다 몸이 하자는 대로
누구 한 사람 불평불만 없이 달관했다 행복해 보인다
서너 시간 후면 칠팔십 할머니 호박꽃들이 봉선화, 분꽃, 민들레, 채송화, 그리고 나팔꽃이 되어 함박웃음 피우며 가는 뒷모습
곱다,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처럼
이아영 시인 / 소, 길들이기
흰 벽을 마주하고 가부좌를 튼다 눈은 반쯤 뜨고 내 무릎을 칠 번개를 찾는다
배꼽 밑 단전에다 숨을 멈추고 내쉬는 동안 허벅지 밑 종아리로 개미 몇 마리 스멀스멀 기어간다
일광욕을 즐기다 시간을 놓쳐버린 지렁일 개미 떼가 어디론가 끌고 간다
잠시 감기는 눈을 치켜 떠보니 처마 끝에 풍경은 잠든 지 한참인데 종각 안에 나래 펴는 그녀는 누구인가
청산은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데 백운은 어디까지 떠다니는지
천방지축 허공을 날뛰는 소의 꼬리
언제쯤이면 마음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몸에게 허공을 떠다니라 할까
이아영 시인 / 체중계
내 등에 올라설 때마다 다리가 떨리고 심장도 두근거리지 바늘이 자기 발바닥을 찌를 거야 될 수 있으면 바늘이 왼쪽으로 움직이게 하란 말이야 오늘도 친구 만나 피자 한 판 먹어 치웠잖아 커피에 시럽까지 넣어 마셨잖아 동네 앞산을 매일 다닌다고 해놓고 왜 내 말을 안 들어? 내 말 잘 들으면 S자 몸매에 옷맵시도 날 텐데 그것뿐이겠어? 편두통 만성 소화불량 잔병치레 사라질 텐데 좀 잘 봐달라는 말도 하지 마 날 매몰찬 사람이라 말하지 마 자기가 내 등 자주 오를수록 체중 관리 잘해줄게 어김없이 약속 잘 지킬게 건강 체크까지 해주는 스마트한 남자
이아영 시인 / 청령포의 뜬소리
삼면이 구비치는 서강물 등껍질 벗긴 곤룡포는 찬바람에 나뒹굴고
왕관 잃은 애통한 사랑이었을까 두문불출 삼일 통곡 끝에 모든 책을 불사른 설잠雪岑* 승속을 넘나드는 두타행하면서도 일거수일투족 귀명창이 된 저기 저 관음송觀音松은 왜 못 그렸을까
내려놓자 내려놓자 다짐하면서 거룻배 타고 강 건너가는 오늘 매월당의 묵매도墨梅圖를 붉은 놀에 묻어두고 볼멘소리 뜬소리 되뇌어본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법명,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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