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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아 시인 / 심야버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1.
최승아 시인 / 심야버스

최승아 시인 / 심야버스

 

 

막다른 곳에서 길은 시작되죠

서두르지 않기로 해요

어차피 내리막인 걸요

돌발은 언제나 예정 밖의 일

하차를 두려워하진 말아요

지름길을 가리킨다고

정해진 노선이 달라지진 않잖아요

부재를 꿈꾸지만 이정표는

매번 다가오기 마련이죠

정류소는 한 번에 열리지 않는 저장고

대부분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보관하죠

갈림길은 가장자리를 돌려가며

조금씩 뜯어먹기로 해요

아직 교차로가 남아있나요

곧 어둠에 익숙해질 테죠

극적인 순간은 자주 오는 게 아니니까요

점멸등은 깜박거리나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우리

이제 멈춤에 길들여지나요

풀숲에서 꺼낸 어둠이

사방연속무늬로자라는 중이에요

 

-시집 <비가역적 강의실>에서

 

 


 

 

최승아 시인 / 광대들

 

 

 우리는 가면 위에 가면을 덧씌웠다 가면 뒤에 숨어 목청을 허스키로 갈아 끼웠다 소품으로 웃음을 그려 넣자 우리는 웃지 않고도 웃을 수 있었다 분장이 끝나면 우리는 조금씩 누군가의 얼굴이 되어갔다 리듬에 맞춰 허밍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후생의 우리를 겨냥했다 바닥이 공중을 매달았지만 누구도 매달리지 못했다 구름을 지우자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웃고 있었는데 흘러내린 건 눈물이었다 박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객석은 침묵했다 무대 밖을 뛰쳐나가려다 안으로 넘어졌다 리허설은 끝이 났다 조명을 벗자 젖은 발이 꿈속으로 말려들어 갔다

 

- 시집 〈오프너〉 한국문연 | 2019년

 

 


 

 

최승아 시인 / 역주행

 

 

 마주 앉은 타인들이 간편식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타성에 젖은 가족처럼 자다 깬, 부스스한 얼굴을 차창 밖으로 태연히 밀어낸다 책등을 켜고 해독되지 않는 시간을 읽어 내리는 동안 지명이 아득한 구간마다 교체되는 익명의 얼굴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멀어지는 간이역에서 차례차례 밑줄을 그으며 굴을 통과한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 어둠 속에서 쌓이는 줄 모른 채 내려앉는 미세먼지들, 마주보며 달리는 우리는 각자의 열차, 헤어지지 못한 연인처럼 거꾸로 달린다 입을 가리고 쿨룩거리던 여자는 마침내 잠잠해진다 부정승차로 적발된 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예정된 역을 향해 꼬리지느러미를 흘리며 열차는 뱀처럼 스르르 미끄러진다

 

 


 

 

최승아 시인 / 바닷가

 

 

눈부신 햇살 끝없이 펼쳐진 바다

불어오는 찬바람

바닷물 머금고 귓가를 스친다

 

밀려오는 파도 마주하고

황금빛 모래에 엉덩이를

살포시 내려 본다

 

철썩 처얼썩 쏴아

하얀 거품 남기고 밀려가는 파도

들어오라 속삭이며 춤춘다

 

살포시 눈 감는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푸른 바닷속으로 빨려간다

 

물고기 하나 되어 나풀나풀 춤춘다

자유, 행복, 만끽하며

살포시 눈 뜬다

 

가슴에 살며시 손 얹으며

평온해진 마음 갖고 돌아선다

황금빛 모래알 발자국 남기며

 

 


 

 

최승아 시인 / 순간 찾아 드는 행복

 

 

아침 눈을 뜨고

한잔의 물을 들이킨다

 

가방 어깨 메고

자동차에 오른다

 

찬바람 이기느라 재킷 움켜잡고

발 동동대며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가로수 벌거숭이 되어 추위에 떤다

아침 풍경 한눈에 담는다

 

알몸 부딪치며 샤워장은 시장바닥

우르르 뛰어든다 물속으로 풍덩!

파란 색칠을 한 수영장 바닥

출렁이는 물과 하나 되어 춤춘다

 

파란색 하나 된 곳에

내 몸같이 춤 춘다

 

파란색 하나 되어 춤출 때

소리 친다 뇌 속에서

아! 행복하다

아! 행복하다

 

 


 

 

최승아 시인 / 폭주

 

 

그는 한밤을 종횡무진 달린다

주말명화 속 코뿔소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린다

밤의 화면을 찢고 달린다

돌아가는 법을 모르고 달린다

고요할수록 두드러지는 질주

길들여진 야생이

본능을 흡반처럼 달고

전력을 다해 달린다

갈기를 휘날리며 달린다

전속력으로 달린다

야유를 질겅질겅 씹으며 달린다

영문도 모르고 달린다

달리기 위해 달린다

 

트랙을 벗어나 본 적 없는

그는 멈추는 법을 모른다

 

 


 

 

최승아 시인 / 모라벡의 역설

Moravec's Paradox

 

 

시시각각 당신을 검색한다

데이터가 무제한인

당신은 언제나 예민한 촉수를 가진다

가끔은 내가 먼저

당신을 끌 때가 있다

당신에게 나는

단축번호 몇 번으로 저장될까

조각을 내지 않고

파이를 나눌 순 없나

우리는 한 판의 피자

서로의 토핑이 되지 못한

위로가 쪼개질 때

떨어진 조각을 기억한다

당신에게 쉬운 것이

내겐 어렵고

내게 쉬운 것이

당신에게 그토록 어려웠다니

엇박자인

당신과 나를 가만히 내려놓는 밤

 

—계간 『시와 사상』, 2017년 가을호

 

 


 

최승아 시인

1954년 부산에서 출생. 2012년 계간《시와 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오프너』 『비가역적 강의실』.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