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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두안 시인 / 검은 고양이 K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6.
김두안 시인 / 검은 고양이 K씨

김두안 시인 / 검은 고양이 K씨

 

 

먼저 높이 튀어 오르세요

대형 트럭이 좋겠죠

악― 후회는 경련으로 충분해요

지글거리는 아스팔트 바닥에 털가죽 하나 말리기 좋은 밤

검은 고양이 K씨

머릿속 깨진 생각들 버리세요

한길 수산 생선들 비웃음도 지우세요

톡 빠져나온

당신 눈동자를 보며

자― 편하게 누우세요

이제 배를 터뜨릴 거예요

퍽 소리 날 거예요

내부가 터지는 소리 수염으로 가만히 더듬어 보아요

호랑이처럼 야―옹 웃게 된다면

하루가 엉망진창이 될지도 몰라요

검고 윤기 나는 털가죽

창자와 뒤섞여 피범벅이 되는 걸 원치는 않겠죠

뼛조각이 마음을찌를 땐

참지 마세요

고통은 야비하게 피어나는 거예요

당신이 찢어 버린 누군가의 웃음이잖아요

보세요

발톱으로 당신 목덜미 움켜쥐고 있잖아요

미련 많은 K씨

이젠 제발 털가죽을 벗으세요

바퀴가 바람을 휘감고 지나칠 때

팔을 아주 천천히 빼고

두 다리와 늘씬한 허리

확 비틀며

나비의 흰 영혼을 낚아채듯

힘껏 튀어 오르세요

대형 트럭이 좋겠죠

당신은 당신의 납작한 시체가 되는 거예요

눈동자도 터뜨릴 거예요

지글거리는 아스팔트 바닥에 알몸 하나 말리기 좋은 밤

그다음은 저도 몰라요

검은 고양이 K씨

이젠 웬만하면 당신을 아는 체하지 마세요

 

 


 

 

김두안 시인 / 개

 

 

 나는 부른다 좁은 길로 걸어오는 그녀를 부른다 판잣집 앞에서 마른 사료를 토해 내듯 부른다 마당 밤 잎을 쓸어 내고 털가죽 황토 먼지 털어 낸다 이빨 자국이 난 전깃줄 넥타이를 매고 슬퍼 보이지 않게 발을 구른다 나는 발톱을 숨기고 혓바닥을 내민다 그녀는 악수하지 않고 나는 꼬리를 흔든다 그녀는 향수를 바르고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희고 가는 손이 허리를 쓸어내린다 아 역시 나는 개다 오줌을 질질 흘리고 낑낑대는 개다 내 성기는 주머니에서 튀어나오고 그녀는 내 발정을 보고 황급히 돌아가 버린다 나는 고름이 흐르는 성기를 핥으며 그녀를 또 생각한다 쇠 말뚝과 얼어붙은 밥그릇 보며 목울음을 삼킨다 내 그리움 어디든 문질러 버리고 싶다

 

 


 

 

김두안 시인 / 독백 영화관

 

 

왼손으로 마실 거야?

오른손으로 마실 거야?

 

유리컵 속에서 물이 식어 가고 있어

다시 말해

손잡이는 하나, 너는 손이 둘,

 

물을 마시다 똑같은 자리에

진실을 내려놓지 마

 

옷을 벗고

이불 위에 누워 새벽 4시를 생각하지

 

유리컵 속에는 물이

조금 남아 있어

새벽이 얼룩얼룩 밝아 오지

 

사랑은 우산을 닮았는데

비가 내리네

 

기도를 하다 눈물이 마른 손들아

사랑을 더

할 거야? 말 거야?

 

 


 

 

김두안 시인 / 물론의 세계

 

 

피아노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의 얼굴은

고요가 지원진 32세

흰 블라우스와 우아한 꽃무늬 치마를 입었군

 

음악이 유령처럼

떠다니는 동안

방 안에 향수 냄새가 난다

 

나는 기록한다 외로움이 죽어서 음악을 찾아왔다

그러나 음악 속에 가득 유폐된 눈물들, 음악의 투명한

머리카락이 자라나 나는 눈을 감는다

 

음악이 내 슬픔을 본다,멈추어 다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다만 안 된다고

 

피아노 속에서 비가 내린다

고양이가 나를 듣는다

누군가 피아노 속에 지독한 사랑을 숨겨 놓았군

 

그래요 “난 사랑을 들켜 버렸어요”

음악의 목소리가 쉼표처럼 떨린다

 

난 피아노 속에서 흘러나온 고독이란 책을 읽는데 왜

기억들은 자꾸 빗물에 젖는지 몰라

 

다시 음악이 자신의 악보를 접고 피아노 속에 공손히

내려앉아 잠이 든다

 

빗속을 홀연히 떠도는

저 비음은

울음일까 노래일까

 

그러니까 “난 괜찮아요”

우리는 물론의 세계니까

 

나는 음악을 깨워 밥을 먹고

방 안에 촛불을 켠다

내 음악은 죽은 지 너무 오래됐다

 

-시집 『물론의 세계』 중에서

 

 


 

 

김두안 시인 / 거미집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 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김두안 시인 / 조도(照度)

 

 

절벽 위로 새가

솟구친다

흑백이 잠깐 빛난 것처럼

 

해안에 밀려온

계산기에서

물기가 떠난다

 

새들의 이름이

혼자라는

두발을 가진 것처럼

 

새가 고도에서

사라질 때

너는 눈이 아프다

 

나비가 잠깐

주황 꽃의

체온을 느낀 것처럼

바람이 물결의 언어로

절벽에

흉터를 낸다

 

새가 스스로 돌아와

제 내장을

보여 줄 때까지

 

너는 내 입속

해안에 떠 있다

 

<시산맥 16년 겨울호>

 

 


 

 

김두안 시인 / 바람이 다시 쓰는 겨울

나는 강물의 얼굴을 알고 있다 새들이

죽은 버드나무 위에

집을 짓지 않은 시간에 대하여

물결이 물결 위에 쌓이는 겨울 강물의 폐허에 대하여

나는 죽어도 좋을까

다시 죽어도 좋을까

버드나무는 죽어서도 버드나무 뿌리에서 시작해 가지에서 끝나는

겨울의 찬란한 혁명을 알고 있다

버드나무를 구름이라고 부르는

언 강물을 긴 편지라고 부르는

까마귀 떼가 누군가의 심장을 파먹다

가-가-가- 외치며 날고 있다

버드나무의 얼굴이 귀신처럼 휘파람을 불면

눈이 올 듯 번지는

수상한 노을의 저편

바람이 바람결 위에 쌓이는

겨울 강물에

죽은 버드나무 그림자 백지장처럼 얼어가고 있다

얼어붙은 그림자 위에

바람이 새로 새긴 투명한 잎사귀들

해가 얼음 속으로 스미는 저녁 무렵

버드나무의 전생을

바람이 다시 쓰는, 겨울 강물에 대하여

 

 


 

김두안(金斗安) 시인

1965년 전남 신안군 출생.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거미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달의 아가미』 『물론의 세계』. 한국시인협회와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