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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길 시인 / 여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7.
김종길 시인 / 여울

김종길 시인 / 여울​

 

여울을 건넌다

풀잎에 아침이 켜드는

개학날 오르막길.

여울물 한 번

몸에 닿아보지도 못한

여름을 보내고,

모래밭처럼 찌던

시가를 벗어나,

질경꽃빛 구월의 기류를 건너면,

은피라미떼

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

아침 풀벌레 소리.

 

 


 

 

김종길 시인 / 가랑잎

 

 

자식들 모두

짝지워 떠나보내고

기러기떼처럼 떠나보내고

 

九萬里 長天

구름 엷게 비낀

늦가을 해질 무렵

 

빈 뜰에

쌓이는 가랑잎을

늙은 아내와 함께 줍는다

 

 


 

 

김종길 시인 / 부부夫婦

 

 

어두운 부뚜막이나

낡은 탁자 위 같은 데서

어쩌다 비쳐드는 저녁 햇살이라도 받아야

잠시 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쌍의 빈 그릇

 

놋쇠든 사기이든 오지든

오십 년 넘도록 하루같이 함께 붙어다니느라

비록 때묻고 이 빠졌을망정

늘 함께 있어야만 제격인 사발과 대접

 

적잖은 자식 낳아 길러

짝지워 다 내어보내고

이제는 둘만 남아

이렇게 이따금 서로의 성근 흰 머리칼

눈가의 잔주름 눈여겨 바라보며

 

깨어지더라도 함께 깨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부질없이 서로 웃으며 되새겨보면

창밖엔 저무는 날의 남은 햇빛

그 햇빛에 희뜩이는 때아닌 이슬방울

 

 


 

 

김종길 시인 / 달

 

 

진주빛 흐르는 보릿짚을

낱낱이 엮은 방석을 깔고

달 밝은 뜰에 앉아 삼을 베낀다

 

밤 여울 물소리 울리는 언덕길을 돌아

물에 잠겼던 무거운 삼단을 지고

아희야 열 일곱 살 곧은 종아리

고이 고이 옮겨 오너라.

 

이웃 마을에 시집간 딸

산 넘어 돌아오고

봄에 맞은 어린 며느리ㅡ

 

어른은 삼가히 섬길 것이라

철들어 이제 알면서도

때로는 귀여운 희롱을 잊지 않음은

늙어가는 어버이 앞에 베푸는 고운 정성이려니

 

ㅡ삼 줄기 줄기 베끼면 하얀 겨릅대

겨릅대처럼 희고 곧은 마음들,

달 쳐다보며 삼을 베낀다. 달 쳐다보며 삼을 베낀다.

 

ㅡ시선집 <하회에서에서>

 

 


 

 

김종길 시인 / 여름 노고단

 

 

구름은 바다가 되고 산은 섬이 되고

바람에 씻긴 얼굴 풀빛으로 물든다

빨갛게 달구어진 해가

산등성이를 구른다

 

노고단 발아래 구상나무 고사목

병들지 말라는 지구의 경고음 같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하다

 

-《시조미학> 2021. 겨울호

 

 


 

 

김종길 시인 / 황락(黄落)

 

 

추분(分)이 지나자,

아침 저녁은 한결

서늘해지고,

 

내 뜰 한 귀퉁이

자그마한 연못에서는

연밤이 두어 개 고개 숙이고,

 

널따란 연잎들이

누렇게 말라

쪼그라든다.

 

내 뜰의 황락을

눈여겨 살피면서,

나는 문득 쓸쓸해진다.

 

나 자신이 바로

황락의 처지에

놓여 있질 않은가!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김종길 시인 / 경이로운 나날

경이로울 것이라곤 없는 시대에

나는 요즈음 아침마다

경이와 마주치고 있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창밖 화단의 장미포기엔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이 영글고,

​산책길 길가 소나무엔

새순이 손에 잡힐 듯

쑥쑥 자라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항다반*으로 보는

이런 것들에 왜 나의 눈길은 새삼 쏠리는가.

세상에 신기할 것이라곤 별로 없는 나이인데도,

 

* 항다반 : 항상 있는 차와 밥이라는 뜻으로, 항상 있어 이상하거나 신통할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 예) 그가 약속을 어기는 것은 항다반의 일이라 그러려니 한다.

 

 


 

김종길(金宗吉) 시인 (1926~2017)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본명 김치규.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1958~1992년까지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 및 문과대학장 역임. 1988년에는 한국 시인협회장 역임. 목월문학상, 인촌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시집 『성탄제』 『하회에서』 『황사현상』 『달맞이꽃』 『해가 많이 짧아졌다』. 시론집 『시론』 『진실과 언어』 『시에 대하여』 『시와 시인들』 등. 향년 9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