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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시인 / 꽃으로 서다
그는 조용히 나에게로 와서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냥 갔다 그 사람의 뒷모습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 서서 그의 앞길에 먼 눈길 보내는 길지 않은 시간
엷고 부드러운 것이 건너간다
점점 멀어지는 그
꽃은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향해 서 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누군가 있다
정해영 시인 / 가족
케이크를 둘러싸고 평평하고 둥그렇게 모여 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뼈아픈 것이 된다
가족은 케이크처럼 모여 있다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며 참았던 눈물을 닦아주며
끈끈하고 부드럽게 중심을 바라보며 모여 있다
정해영 시인 / 4월의 베스트셀러
쟁여놓은 시간이 싹틔운 봄의 문자 벚꽃 잎 가지마다 분홍빛 문장 만개(滿開)다 비탈진 행간 사이 축축하게 어둠을 머금은 활자들이 절정으로 타오르는 눈부신 길을 낸 한 권의 책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새 페이지를 넘겨주는 보문 호숫가에는 4월의 베스트셀러가 펼쳐져 있다
정해영 시인 / 들리지 않는 말
벌어지지 않는 석류처럼 입을 다문 일이 있다 침묵 속에서 하루를 보내본 사람은 안다 열 시와 오후 세 시는 느낌은 비슷하지만 기울어져 있다 해 뜨는 쪽과 해 지는 쪽으로
기다려야 할 것과 서둘러야 할 것을 아는 석류는 아직 입을 벌리질 않는다
천 개의 말을 머금은 속이
붉게 익고 있다 때가 되면 흘러넘칠 말
시간의 표정 따라 소리 없이 색깔이 짙어지고 있다
계간 『애지』 2023년 가을호 발표
정해영 시인 / 이상기온
넷째 기동이 열대여섯 살 됐을까 면장 집 손자를 때려 이빨이 세 개나 부러졌어 대쪽 같은 아버지 몸 구부려 빌고 허둥지둥 돈을 구해 새 이를 넣어줬어 그 후 그 집 앞을 죄인처럼 지나다녔지 그래도 우리 칠남매는 부모 애 먹인 적은 없었다 끓던 이야기 서늘히 식혀 우스개로 흘리시던 어머니 낯설은 사람이 되어 치매 병동에서 아들도 잊고 당신의 이름마저 잊으셨다 바라보시는 눈길 얼음 같다
해마다 돌아오는 사월이지만 이상고온과 폭설이 널뛰듯 오르고 내린다 먼저 핀 꽃들은 힘없이 떨어졌다.
혹한과 꽃놀이가 한 몸에 있다.
나비처럼 엷은 봄바람 타고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꽃가루 부비며 꿈을 산란하던 먼 산 위의 봄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정해영 시인 / 꽃은 새를 꿈꾼다
아카시아 꽃향기 너는 먼 새 산 아래 꽃대가 흔들릴 때
수천마리가 보이지 않는 날개를 쳐서 이곳까지 온다
자정이 넘은 책상머리를 작게 혹은 크게 원을 그리며 깃털을 날린다
오 너는 들리지 않는 울음 울며 멀리서 날아온 새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때까지 그리는 것이다.
그리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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