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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식 시인 / 인생 대학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7.
김현식 시인 / 인생 대학원

김현식 시인 / 인생 대학원

 

 

늦게나마 인생대학을 졸업하고

인생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어렵게 받은 수료증을 고이 모셔놓고

어렵다고 소문난 인생대학원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새로운 커리큘럼과 전혀 다른 모습의

교수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교육을 위해

미리 대기하고 있는 듯 했다

항상 보아오던 캠퍼스였지만

투명하고 만질 수 없는 울타리가

둘러져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울타리를 넘어 온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다른 모습들,다른 삶의 프로그램들,

구태의연한 학부생활을 마감하고

어렵지만 개원이라는 새로운 인생대학원에

입학한 감회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김현식 시인 / 순수

 

 

우리 다인실 병실에서는 아무도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 환자도 보호자도

가끔 커튼을 치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막 들어온 신참이다

 

진폐증으로 폐에 구멍이 뚫려

호스를 달고 있는 늙수그레한 아저씨

옆에 수발을 들고 있는 소박한 아내

제 병은 잊은 듯

앞의 환자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폐암 환자는 짐짓 자신의 무거운 짐을 부려 놓는 듯

제 잘못이지요 그렇게 끊으라던 담배를

이제껏 피우고 있었으니까요

라며 얇은 미소를 지었다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

아플 때 순수해지는

어느 순간,

환한 믿음이 그림자를 밀어내고

병실에서는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내는

 

오, 오랜만에

우리 식구들 모였구나

 

 


 

 

김현식 시인 / 고라니와 마주치다

 

 

 산그림자가 한껏 움츠린 빛나는 아침에 고라니가 뛰어 가네 포장도로를 건너 텅 빈 논과 밭을 지나 고라니가 달려 가네 건너편 언덕으로, 삶의 기운이 뻗쳐 가네 고라니의 쫑긋한 귀와 발끝을 타고, 새파란 눈빛의 부딪침, 스파크, 마른 번개가 치고 충전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하였네 반짝번쩍 어둠 속의 고양이 눈처럼 빛나네 검불 속에 응축되어 있던 서늘한 기력이 충전코드를 타고 달려 가네 영혼의 콘덴서를 향하여, 게으른 벽을 뚫고 저장되는 상서로운 기운이었네 어느 날 아침 고라니는 그렇게 다가 왔네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나태한 마음의 호수에 돌을 던졌네 영혼의 창문을 두드리는 파동이 사인곡선처럼 퍼져 가네 그의 끓는 심장과 장대같이 곧게 뻗는 다리근육 쪽으로 쏠리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동안근을 긴장시키는 파격의 원심력으로 무료한 벽을 뛰어 넘어 가네, 얘들아, 이른 아침에 고라니를 보았단다, 계백장군의 전령사를, 시내 가까운 들판에서 우리 앞을 거쳐 바로 옆 언덕으로 뛰어 가는 것을.

 

 


 

 

김현식 시인 / 우화

 

 

혁명적이다

 

번데기의 명상은

악몽처럼

지루하다

 

변화는 힘들다

 

거칠고 메마른 바닥을

오랫동안

애벌레로 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김현식 시인 /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도들

 

 

안식의 지팡이를 미끄러지듯 내려온 전사들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몸을 뚫고 들어가 몸 속 구석구석을 핥는다

독침에 물린 너는 꼼짝도 하지 못한다

 

몸 속에는 종종 갖가지 열매가 열린다

너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독버섯 같은 금단의 열매들을 먹어 치우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감시에 소홀이란 낱말을 알지 못한다

사명감으로 무장한 사설탐정처럼 씨씨티비처럼

깨끗한 대욕탕에서 정성들여 목욕하고 성수를 뿌리고

몸을 정갈하게 가꾸면서 계시의 순간을 기다린다

신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하는 대제사장처럼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분뇨통 가득한 혐오의 골짜기를 지나

비밀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음침하고 냄새나는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암울함과 부패가 극에 달할수록 바빠지는 행보

목까지 차오른 결단의 시기에는 대홍수를 불러 오물로 가득한

고담시를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기도 한다

 

죽음의 쌍두마차를 역주행시키고

불태워버린 위대한 스승의 부활을 믿는

충직한 복음의 전도사들이다

 

 


 

 

김현식 시인 / 환상

 

 

아메리칸드림 탈렌트 명품 슈퍼모델 해외여행 미스유니버스

나약한 현실은 환상을 좇고 환상은

좀처럼 끝내기 싫은 크루즈여행이다

낮꿈밤꿈 약물복용 술담배 눈시리게 푸른 남태평양 해변의

정염 남미 삼바축제

비행기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설렌다고 하는 나이 지긋한 여인과

한달에 보름쯤은 외국에 나다닌다는 그의 친구는

여행상품 광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부정부패 원조교제 현실도피 불륜 투기 도박 사기 파멸 자살

환상은 때론 현실을 배척하고 환상의 깊이는

현실의 고뇌의 크기에 비례한다

이상과 사랑은

소원의 별

설렘과 희망으로

바라볼 뿐

너를 스치는 것은

차가운 현실의 바람

별이 찬란하게 빛날수록

더욱 차가와지는

 

 


 

 

김현식 시인 / 유월의 살구나무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창밖엔 비가 내린다 기억나는 일이 뭐,아무것도 없는가? 유월의 살구나무 아래에서단발머리의 애인을 기다리며 상상해보던피아노 소리 가늘고도 긴 현의 울림이바람을 찌르는 햇살 같았지 건반처럼 가지런히파르르 떨던 이파리 뭐 기억나는 일이 없는가?양산을 거꾸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아! 살구처럼 익어가던 날들이었다 생각하면그리움이 가득 입안에 고인다 피아노 소리는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살구처럼, 양산의 가늘고도 긴 현을 두드리던살구처럼, 하얀 천에 떨어져 뛰어다니던 살구처럼,추억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추억의 건반 위에 잠드는 비, 오는, 밤

 

-199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당선작

 

 


 

김현식 시인

전남 광주광역시 출생.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 2006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 『나무늘보』 『꿈길』 『시의 향기』. 현재 충주에서 "두리장사랑 외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