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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숙 시인 / 솜틀집은 사라지고
솜틀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동문 안을 들어서는데 전신주 벽에 "솜 틉니다" 문신처럼 박혀 있다.
바랜 벽돌담과 굳게 닫힌 문, 아가리를 땅에 처박고 물구나무선 절구통, 우듬지 끝에 전선도 없이 매달린 이장집 확성기, 담벼락 끝까지 기어오른 담쟁이 몇 잎이 지나가는 사람하나 둘.... 세고 있다.
삼십 여년 내가 지나던 길. 옛날엔 눈 감고 심호흡하면 전쟁으로 다 타버렸던 목조건물 터는 가끔, 기둥이 세워지고 서까래가 생기고 지붕에 불 기왓장을 얹은 눈부신 동문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내가 좋아라 달려가면 집도, 나무도, 그림자도, 그때 주머니 속 구슬도 함께 뛰고, 강아지 목에 매달린 방울도 뛰고, 겹겹이 펴 찢긴 목화솜도 솜틀도 덜덜거리며 돌고 하늘로 올라간 구름이 된 솜덩이도 가끔, 솜틀집 지붕 위에서 서성거리다 사라지곤 했는데.
솜틀 돌아가는 소리도,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올려다본동문 터에서 신발 벗어 던지고 고무줄놀이하던 나도, 이젠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황정숙 시인 / 북향화(北向花)
그늘 방향으로 꽃이 피어나고 발이 저절로 북쪽으로 나아갔다
누군가 물었다 왜 북쪽을 향해 사느냐고 방향을 막을 방법이 없느냐고
대답 대신 꽃이 활짝 피었다
하얀 꽃잎을 북쪽에 덧대 한 장씩 햇살을 등지고 피워내는 봄, 목련처럼 북쪽으로 가고 있네 어느 신발에 신겨질 수 있을까 오늘을 거슬러 걸어들어가
귀가 후 밤이면, 신발을 벗어 진열장에 넣고 꺼내지 않았다 어둠을 펴서 흩어진 재료를 넣고 웅크린 허기를 발 없는 신발 속에 꾹꾹 구겨 넣다가 굴려보면 색과 향기가 도르르 말릴 것 같아
무릎을 세운 몸이 접혀졌네 하루를 폈다 접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네, 싶은 순간
북쪽으로 저절로 몸이 말렸다 발이 북쪽으로 접히고 있다
—《유심》 2015년 1월호
황정숙 시인 / 세월에 묻어 둔 기억
돌아올 수 없는 찰나들을 기억속에 담았지만 제한된 공간 속에 더이상 채울 수 없어 삭제되어 간다
빠른 손놀림으로 꽃이 변하여 비둘기가 되어 날아가는 마술사의 눈속임처럼 사라져간다
세월에 묻어둔 기억을 잡고 싶지만 자꾸만 작별하니 언제까지 잡을 수 있을까 아쉬움의 끈을 꼭 잡고 있다
황정숙 시인 / 이명
자정이 넘어 문단속을 마치고 자리에 눕는다 고요를 밟고 귓속의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 가깝게 들렸다 멀어지는 소리로 흐르는 길 돌아가는 것은 다 전원을 꺼버렸는데 귀는 쉼 없이 소리를 재생한다 어떤 소리에도 나는 귀를 열고 싶지 않은데 문득, 고막을 찢듯 다가오는 굉음이 저벅저벅 귓속에서 걸어 나온다 젊은 시숙을 부평 화장터로 들여보냈던 문밖에서 울어대는 조카 셋을 품에 안았던 그날부터였나 내 몸에 집을 짓고 사는지 때론, 불청객으로 뛰쳐나와 삼 일 밤낮을 양철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듯 딱따구리 나무 속을 파 내려가듯 달팽이관을 두드리고 찌르는 통증 머리칼을 바늘처럼 세우고 턱관절을 깁는다 이승을 빠져나가지 못한 영혼의 옷자락 소리 강약 조절 센서의 엉킨 회로처럼 끝없이 되감기고 풀리는 소리의 메아리 귀를 손가락 끝으로 막으면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 희미해진다 귀는 소리의 풍요 속에 고요의 빈혈을 앓고 있다
황정숙 시인 / 뜨거운 잠이 읽던 헬더린 송가
목련꽃을 차로 말리며 뜨거운 잠을 읽는다
꽃들은 오그라지며 꿈을 꾼다 한잎 두잎 뒤적거리며 누군가의 기척을 말리는 일 결국 제 울음을 말리는 일
바람의 입김에도 나뭇잎은 몸을 떨듯이 늘 마음을 흔드는 시간에는 시곗바늘이 없다 짧은 봄이 뜨거운 슬픔으로 떠나가곤 했다
마야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그 풍요의 속살을 감싸던 열기로 살내음 가득한 허공
북향의 길들을 찾아 나선 꽃들은 오 촉짜리 전구를 하나씩 숨기고 있었다 봄을 위한 조등이지? 막, 당도하려는 계절을 향해 물었다
찻잔을 들여다볼 때마다 어느 한 소녀의 비유된 꽃의 형상을 볼때, 그것은 그 소녀와 똑 닮았다. 우리는 삶을 가지고 있지만, 꽃은 향기를 가지고 있다던 그 슬픈 시인의 삶은 꽃과 봄 사이에만 은유로 읽었다. 길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짧게 뱉는 것처럼 꽃은 가벼워지고 잠은 점점 희미해지고,
나의 꿈은 은유이거나 비유 어느 계절에도 마침표를 찍지 않았기에 휄더린의 송가를 읽던 뜨거운 잠의 목련 그 낱장을 찻잔에 넣고 봄을 우려내는 것이다
황정숙 시인 / 정오
허공에다 빗줄기를 흩뿌리듯 국수를 삶는 정오 식구들이 젓가락 짝을 맞추며 식탁 아래서 눈알만 굴리고 있다 너무 오래 돌고 돌아서 아침과 저녁은 닳고 닳아 사각사각 뽕잎 갉는 소리만 고요한 정오 허기를 무쇠솥에 넣고 휘휘 젓고 있는 정오 할머니가 국수를 젓가락에 둘둘 말고 있다 필사적으로 씹히려고 잇몸으로 들어가는 긴 선들 휘어지고 구겨지고 엉키기만 하는 선들 비가 사각사각 제 소리를 뜯어먹고 있다 오물오물 실처럼 풀려나오는 그 시절을 이 없는 입으로 뚝뚝 끊고 후루룩거리는 정오 불어터진 면발이 퉁퉁 뱃구레만 불리고 있는 정오 식구들이 눈알을 멈추고 실꾸러미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끈적끈적한 정오가 막 지나고 있다
황정숙 시인 / 바람의 행적
구름을 몰고 온 바람이 통 안에 가득하다 뼈를 파도처럼 일으키며 소 울음소리로 운다
땅에 귀를 대고 말발굽 소리로 거리를 측정한다는 타타르 왕국 목축인들은 구름의 크기, 빗방울의 수로 바람의 무게를 느낀다는데 촘촘하게 박혔던 골수들은 뼈울음으로 그동안 살아온 소의 행적들을 잰다
서쪽으로 바람이 떠난 자리 불의 혀들이 소화되지 못한 말들을 되새김질 한다 코뚜레에서 풀려난 것들로 들끓는 통 속엔 푸른빛 기름기로 겉돌던 불온한 시절이 있다 뿌리 내릴 곳 없는 사막의 풀씨로 견디는 시간쯤이야 풍화되는 화석처럼 밤새 제 몸을 비워간다지만 바람이 걸어온 행적을 길은 바꿀 수 없다
울음이 끝나는 곳 누린내 풍기는 길이 겹겹이 우려진 시간 숭숭 뚫린 뼈에서 파도 소리가 난다
흙먼지 동반한 발자국 천천히 바깥세상으로 걸어나온다 곰국 사발에 뽀얗게 피어오르는 편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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