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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경 시인 / ​하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7.
이문경 시인 / ?하지

이문경 시인 / ​하지

 

상처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은 밤을 향해 걷는다

눈이 부실 때마다 주머니 속 사탕처럼

뭉개진 슬픔을 꺼내 먹으며

어떤 연인은 그늘 안에서도 안대를 쓴다.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숨을 훔쳐 마시거나

아무리 비벼도 돌아오지 않는 온기를 그리워하다 선잠에 들고

찬란한 햇빛 아래

귀여운 표정으로 애인을 울리는 그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오른발에 뼛조각 하나가 더 있어

소리 내지 않고는 발 딛는 법을 모른다지

여름, 죽는 것보다 평생을 자는 게 낫다고 여기는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기로 한다.

목소리를 잃어버릴 것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릴 것

어제를 앓다가 내일을 통째로 지워버릴 것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자주 넘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뒤에 올 이를 위해 울음을 피처럼 뚝뚝 흘릴 수 있다

당신을 향한 문장을 벼리며 밤을 기다린다

진짜 버림받는 기분을 알 것도 같다

​​

-문학3 2019 3호

 

 


 

 

이문경 시인 / 민들레

 

 

모두가 잠든 밤

대지는 밤새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따뜻한 입김 호호 불어

구슬 수 천 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죽은 나뭇가지에 맺힌

천 개의 물방울

비가 괜히 온 게 아니었다"고 시인이 말한 것처럼

밤이 괜히 밤이 아니었다.

밤이 사랑한 것은 아우성치는  침묵, 파도 치는

그리움, 그리고 찬란한 아침이었다. 아침! 영롱한

이슬의 천둥같은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가?

 

 


 

 

이문경 시인 /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

 

 

생각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이미 흘러 내려 높이를 잃은 눈물

엑스레이에는 잡히지 않는 흉통

누군가 움켜잡았다가 놓은 심장

 

위선의 눈동자는

속눈썹 아래 감출 수 있어도

의미 잃은 말은 벌레에 갉아 먹힌 잎의 그물맥

그물눈의 문양을 온몸으로 가진 기린은

진실을 거르는 그물을 가진 것이다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으로

많은 것을 알기 때문,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기린의 입과 심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들어 올리듯

성악가의 성대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들어 올린다

청동의 아리아는

가장 정직한 호흡,

말을 잃은 기린의 성대는

심장과 교신한다

심장을 통과해야만 목소리는 완성되는 것

목소리는 눈동자보다

정직하다

 

 


 

 

이문경 시인 / 인형놀이

 

 

1

페달을 밟으며 한강변을 달린다

긴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에 쏟아진다

자전거에는

영혼이 없다고?

당신이 닦아줄 수는 없어도

내 눈물 닦아주는 자전거

어때요 전 속력으로

내가 달린다면

 

2

아파트 주차장 구석진 자리

검은 털실뭉치처럼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

실타래 풀리듯 소리 없이

승용차 엔진에 다가가

온기를 끌어안는다

고양이에겐

영혼이 없다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렇다면 이건 어때요

고양이도 나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3

자동차 시동을 끄고

남자는 아파트 안으로 사라진다

인큐베이터 속,

잠든 얼굴을 비추는 할로겐 조명

따뜻한 양수 속에서 밀려 나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잠든 미숙아는

물속을 부유한다

물속의 집은 고요를 생산한다

 

 


 

 

이문경 시인 /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

 

 

생각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이미 흘러 내려 높이를 잃은 눈물

엑스레이에는 잡히지 않는 흉통

누군가 움켜잡았다가 놓은 심장

 

위선의 눈동자는

속눈썹 아래 감출 수 있어도

의미 잃은 말은 벌레에 갉아 먹힌 잎의 그물맥

그물눈의 문양을 온몸으로 가진 기린은

진실을 거르는 그물을 가진 것이다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으로

많은 것을 알기 때문,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기린의 입과 심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들어 올리듯

성악가의 성대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들어 올린다

청동의 아리아는

가장 정직한 호흡,

말을 잃은 기린의 성대는

심장과 교신한다

심장을 통과해야만 목소리는 완성되는 것

목소리는 눈동자보다

정직하다

 

 


 

 

이문경 시인 / 중독

 

 

다정한 팔을 끼고

지켜보는 내가 약자인 줄 알았지

보여지는 네가 약자인 줄 알았지

내 약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보여서 혼란스러움으로 약자가 되어가고

내 약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전에는 알 수 없던 것들이 자꾸만 알아지는 것이

내 약에는 문제가 없다 그래서

잠도 잘 자고 있는데

내 약에는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서로 단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농구공과 농구코트처럼

내 약에는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지는 너와 보아야 하는 나는 서로 마주치지 않지

가능성의 파동으로 우리는남았으면 좋겠지

단지 경향일 뿐인 것에 대해

다정하게 데려가는 것이다

나의 중독은 더 나은 선택이 없다는 것,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더 나은 꿈을 꿀 수 없는 것이다

2분 동안에도 천만 시간이 지난 듯 늙어버리는 감정들

손잡이가 없어도 저 문을 나는 열고 말텐데

내 약에는 문제가 없다

 

- 2014년 <시와 경계> 가을호

 

 


 

 

이문경 시인 / 흉몽

 

 

목공소 앞을 지나다 재채기를 했는데

눈을 뜨니 어젯밤이었다

자기 전 켜둔 초는 죽지 않고 살아서

흔들렸다 투명한 액체가 되어

심지가 전부 타 버리기를 기다리며

영(靈)이 천천히 돌아갈 수 있도록

침 묻힌 손가락으로 촛불을 꺼야지

제사를 지낼 때면 아버지는 내게

본 적도 없는 이를 떠나보내게 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돌을 쥐고

손끝에 힘주는 법을 익혔지만

어쩐지 손바닥만 벗겨졌다

잔인한 일에는 스승이 없으므로

이제 나는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마지막 인사를 오래 묵히는 일에도 능숙해졌다

외로움은 바짝 건조시켜야 하고

목공소 셔터 위 그래피티, 그 불가해한 문장을 벽지에 그리며

침대 밑에 붙여 둔 부적을 기억해냈다

어디선가 꽃나무 불타는 향이 밀려왔다

부를 수 없는 이름이 하나 더 생겼다

 

 


 

이문경 시인

1963년 경북 울진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2011년 계간 《시작》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강물에서 건져 올린 눈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