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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석 시인 / 초록절벽에 서면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7.
김정석 시인 / 초록절벽에 서면

김정석 시인 / 초록절벽에 서면

 

 

백운산 휴양림에 들어서면

만장(萬丈)이 넘는 초록 절벽이다

비장한 결심도 없는데

 

숨이 턱 막히고

저절로 발끝이 모아진다

 

한 솥이면 도시를 절절 끓게 하던

땡볕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볕들의 블랙홀

초록 잎새마다

햇빛 시체가 눈부시다

 

바람이 스윽 비질하고 지나가면

살아남은 햇빛 몇 알 후드둑 떨어진다

풀이 푸른 팔을 뻗어

허겁지겁 먹는다

 

돌연 소나기 한 줄기 몰려온다

점자 읽듯

숲을 읽어가는

수만 개의 손

마음을 죄다 읽힌 나무들이 부르르 떤다

 

 


 

 

김정석 시인 / 메꽃

 

 

다리 잃은 누이가

블럭담 아래 씨를 뿌렸다

여름 한 철 잘 자란 메꽃이

누이에게 담장 밖 풍경을 보여준다

 

메꽃이 오르는 하늘을

잠자리 떼가 다리미질 한다

하늘이 파랗게 퍼진다

 

잠자리가 누이의 마음을 물어다 하늘에 뿌린다

점점이

흩어진 꽃씨가

명년 봄에는

연보라 빛으로 담 밖에서도 곱게 피겠다

누이의 얼굴을 세상에게도 보여 주겠다

 

 


 

 

김정석 시인 / 강경에서 만난 웃음

 

 

강경 젓갈 시장, 어리굴젓을 팔던 여자

젓갈통들 나란히 좁은 사이를 지나다

엉덩이가 서로 닿아 둘 다 웃었는데

그 겸연쩍은 웃음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웃음도 충청도에서 태어나면

느리게 물무늬처럼 퍼지나 봅니다

한 웃음이 끝나고

그 웃음의 끝을 지우기도 전에

새 웃음이 태어나는 얼굴

어리굴젓, 명란젓, 새우젓처럼

오래 묵혀도 상하지 않는 삼투압 웃음

그냥 하는 인사에도 젓갈처럼 정이 감겨와서

이 맛 저 맛 볼 것도 없이

웃음맛 하나만으로 젓갈 두 통 사들고 왔답니다

어쩌고 저쩌고 수작을 할 처녀 총각도 아니지만

오는 길 내내 마음이 설레설레 일어서기도 하고

품고 온 웃음이며 말들이 삭아가는지

내 몸에서도

강바람에 곰삭은 젓갈 냄새가 났습니다

또 오라는 인사는 못 듣고 왔어도

강경에 가면 아무래도 젓갈부터 사러갈 것 같습니다

 

 


 

 

김정석 시인 / 진달래꽃

 

 

시인이여

밤새워 목구멍에서 피나도록

그렇게 슬퍼함이 하도 깊어

먼 후일 또 먼 훗날

아쉬운 것들을 달래며

그리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못 잊고 아직 못 다 한 것들이

피맺혀 슬픈 것들이 많아

그리 꽃불을 지펴 번지고 있는가

 

시인이여

예전 미처 모르고 있던

그 아쉬운 것들이

예전 미처 몰라서

생각하기에 그 안타까운 것들이

멍울에 맺혀

봄날마다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사랑하는 가슴마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고이 묻어

언뜻 생각나는 것들이 그리워서

산 등성이에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아쉬운 것이 많지만

그 못 잊는 가슴마다

진달래가 피듯

말없이 문득 피어나리라

 

 


 

 

김정석 시인 / 사월

 

 

막 초경을 했을까 하는

큰 딸아이 냄새 같은 것을

바람은 들길에 깔았다

 

찔러 보렴

들찔레 덤불에 굴러보는

산 다람쥐 등에

가시 대신 풀 비린내가 박혔다

 

웃지 마라

너도 사월에는

뒤 가슴에 풀 비린내만 가득 박아내는

풋사랑이었지 않은가

 

 


 

 

김정석 시인 / 탱자꽃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사금파리에서 튕겨 나온 햇살

 

고개를 들어

고개를 들어

말해

 

탱자꽃 환한 울타리 따라

그 애가 왔다

 

 


 

 

김정석 시인 / 화장花葬

 

 

희디 흰 배꽃은 지는데

어쩌라고 국어사전을 뒤척이고 싶어지는 것이냐

화장(火葬)이란 말 대신

화장(花葬)이란 말이 자꾸 쓰고 싶어지는 것이냐

꽃불이 뒤 몸에 옮겨 붙어야 잉걸불이 되는 것처럼

그전에는

그냥 花葬이라 말하자

 

저년

미쳤지

그리 하얀 소복을 입고

저리 아무데나 분분히 날리다니

제 몸에 활활거리는 꽃불의 열기 어쩌라고

 

몰래 지켜보는

花葬

 

 


 

 

김정석 시인 / 프로그래밍 컨트롤러

 

 

프로그래밍 컨트롤러는 수천 개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절벽이다

 

백만 마리의 펭귄이 제 짝을 찾아가듯

백만 마리의 박쥐가 제 새끼를 찾아가듯

0과 1만 읽고 목표 지점을 찾아간다

 

1이면 가고

0이면 멈춰라

 

사람이 알려주는 것은

규칙뿐,

주는 먹이는 5밀리암페어 전류가 전부다

 

일 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너는 폐회로 안을 빙빙 돌아다닌다

실핏줄처럼 엉킨 길을 찾아낸다

수만 개의 이름을 부른다

수만 개의 물음을 돌려보낸다

 

못 찾을 것도

못 갈 곳도 없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음 앞에서는

0이다

 

 


 

김정석 시인

전남 해남 출생. 200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 시집 『별빛 체인점』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 광양제철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