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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형 시인 / 나는 너를 닮고
길은 온종일 걷느라 먼 산을 닮고 부은 발목은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닮고 찡그린 구멍 속으로 생쥐는 막 도착한 저녁 무렵을 닮고 버스 속 기우뚱 매달려 서 있는 남자는 머리를 찧으며 조는 여자를 닮고 산동네에 왕관을 씌우는 저녁해는 분식집 모퉁이 핀 여뀌꽃 무더기를 닮고 버스 기다리느라 낡은 밤색 구두는 등에 닿는 온기로 사귄 은행나무 몸피를 닮고 흙 속에 박힌 돌멩이처럼 살아 있기에 서로 닮고
바다는 벽돌을 촘촘히 실은 손수레를 맨드라미 씨는 그치지 않는 싸움을 그치지 않는 깊은 밤을 닮고
이선형 시인 / 나무 그림자에 쉬다
자기 앞에 그림자 하나 툭 떨어지고 지난 일이나 앞일이나 생각도 없는, 터벅터벅 걷는 밤 있습니다. 녹초가 된 날이지요 마음의 무엇이 혼자 후렛쉬를 켜고 발 앞만 밝히고 가는 집중이 있습니다. 가다가 외진 길가에 겨울나무 제 그림자를 보고 서 있습니다 실가지 그림자 위에 내 그림자 겹쳐집니다 나뭇가지에 잠깐 날개를 쉬는 새 그림 같습니다 기분이 좀 좋아집니다 그러고 빈 길을 걸어가니 거기 새가 날아가는 하늘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오르려 하다가 스스로 장난이 싱겁습니다
잠깐의 시렁뱅이 꿈만큼이나 한 게 있던가, 뭐 자기의 생을 아끼며 살아가려고, 깐에 나도 한 생물체로서 의기소침하여 줄어지는 그림자에게 나는 말을 붙였습니다 물론이지요 옆구리 사이로 부추기는 것이지요 고마운 날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야 알지요 그렇지만 나무 그림자에 깃들고 싶은 날들도 있는 거겠죠 정말 숨쉬는 새, 그런
이선형 시인 / 방
자연과 인간, 동반자적 동행
작은 방 가운데
그림자 덮이네
나, 콩벌레처럼
방이 넓어, 넓어진다
보이지 않네
나, 나는 어디 있나
이선형 시인 / 점심
병원 엘리베이터 안으로 베고니아와 바이올렛 화분들이 라면 박스 담겨 동승하는 바람에 구석으로 비켜서다
너들 모여 있으니 아파서 내사 호강한다야 어머니 병실에 포개놓은 종이컵처럼 삼형제 둘러서다
모서리 벽에 머리를 대고 자던 좁은방 젊은 어머니는 병아리들 담긴 라면 박스를 밀어넣었다
병아리랑 비켜가며 자던 잠보다 더 자주 깨는 병원 잠을 자고 나서 미지근하게 식은 말 대신 형제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흙먼지 걷히면 어젯밤 조각꿈도 흩어져 다 자란 닭들 한 마리 두 마리 어딜 가버리고 닭장 철망 가를 휘휘 걸어보는 늙은 어머니들만 남아
라면 박스 속 병아리들 종종대던 방으로 돌아가시는 먼 길 도중에 앉아 먹는 점심
이선형 시인 / 펄럭이는 제사
경남아파트 1204호에 사람들이 모인다 귀신은 좀만 기다리라 하고 바둑판 집을 세다가 싸움이 난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일수록 불은 부리나케 살아난다 저 형님 또 저래 늙어도 목청은 크제 불난 사람 푹 삶겨 제상에 오르고 느적느적 훈수가 놓인다 김이 펄펄 나는 밥을 찬물 묻혀가며 고봉으로 담아도 메는 걸어 모신 연장이니 서늘하기만 하다 넙죽 절하다가 얼굴은 식은 땅바닥을 만난다 생볼따귀를 치던 재 너머 바람 얼얼하기도 하여 저들끼리 잔불이 남기도 하여 낯은 여직 붉다 끓는 탕국같이 펄럭이다가 개켜놓은 겉옷을 입고 사람들 가지런한 육체를 연다 뿔뿔이 되돌아가는 지상의 검은 보자기 자기도 모르는 새 길게 자란 무덤 속으로
이선형 시인 / 중앙동
숟가락처럼 닳아서 초승달만큼 닳아서 낮은 문턱을 넘어 밤이 된다
그에게는 내가 모를 무슨 연유가 있을 거다
눈이 부시게 막막했던 한낮 친절하지 않았던 사람들 서성이는 바람
문턱을 넘어 날아온 은행잎 밤의 구두는 얼마나 넓고 깊은지 잴 수 없다
은행나무와 나란히 건널목 신호등 옆에 선다 다리를 저는 개를 따라 지하도를 건넌다
새로운 동행과 어긋난 길을 걸어 밤의 주름진 구두 안으로 들어간다
-시집 <나는 너를 닮고> 푸른사상 2011
이선형 시인 / 나는 그대 곁에 있습니다
그리움은 멀리 있어도 그리움입니다. 한그루 깊은 나무처럼 가슴에 담은 그런사람 있습니다
하나하나 헤기엔 부족한 많은 잎 제몸 다 사르고 봄을 기다리는 그런사람 있습니다 그대는 내 곁에 없어도 나는 그대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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