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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임 시인 / 늙은 시인과의 대화
사기등잔에서 흘러내린 맑은 불빛
물에 씻긴 여름 자개항아리
뚜껑에 국화가 그려진 사탕통에서 그는 구멍 뚫린 주머니를 꺼냈다
화원의 자물쇠와 무희의 등뼈 사금을 캐는 계절의 49일간의 폭풍을
그림자만큼 헐렁한 주머니에서 그는 또 꺼냈다 머리에 총알이 박힌 자살인형들을 계단에 묻힌 시체를 벽장에 감춘 사생아를
당신의 연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몸에 묻은 잔볕을 탈탈 털었다 묽은 빛이 걸어나가자 여든여덟개의 계단을 내려가 그는 물고기가 떠다니는 지하방이 되었다
또, 또요 격렬한 거리가 걸어나왔다 일요전쟁과 석간혁명이 호외를 알리는 딱새들의 해안이 피로 물든 흡연구역이
장미를 파는 노파들을 토해내고 우기와 부러진 우산을 건져내고 깨진 수조에 담긴 구름과 일요일을 맹인 동료들과 앉아 있던 귀머거리 주점의 나무의자를 꺼내놓자
그는 뜨거운 물을 마셨다 헤어질 시간일세 관에 드러누운 왼손과 악수하고 그는 마지막으로 밤을 꺼내 양뺨에 발라주었다
눈꺼풀을 내릴 때마다 거대한 흰 손이 보이는 물에 불은 손가락이 형체를 잃을 때까지 씻어낸 단어들 위에 가만히 놓여 있는 심장소리가
이용임 시인 / 스모그
연기로 가득 찬 창문 안에서 발목에 매달려 그림자가 서성거린다 붉은 미등이 줄지어 사라진다 흔들리는 뒤통수들이 희미해진다 자박 자박 자박 엎디어 손톱으로 기어오는 발소리 벽에 부딪쳐 되돌아간다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지붕이 누운 아래 입을 벌려 마른 혀끝을 보이는 창문들 도시 외곽 공장 지대의 굴뚝을 향해 난 길을 따라 여자 하나 자전거를 타고 간다 은빛 바퀴살이 치르륵거린다 누군가 다급한 손바닥으로 탕, 탕 두드린다 사라진 길 위에서
이용임 시인 / 여름 포도를 생각함
멸망을 사시면 몰락을 드립니다 수치를 사시면 절망을 드려요 한시적으로 슬픔은 사랑과 한 세트입니다 장마는 마르고 겨우 잠든 새벽엔 벼락이 쳐요 창문 아래 침대를 둔 잠들이 깨지도 않지만
누가 요즘 청춘을 두르나요 물에서 처녀를 건졌더니 심장에 장미가 꽂혀있더라 가십난의 연애도 무거워 팔리지 않는 여름 저녁 흰 접시 위에 포도 한 송이 말갛게 씻어 올려둡니다
다락에 올려둔 여행 가방의 자물쇠는 녹슬어 열리지 않고 소인이 지워진 여권은 갱신 날짜가 지나고 그 바다에 걸어둔 자물쇠 그 돌 아래 숨겨둔 머리카락 새벽에 핀 첫 꽃을 뚝뚝 따서 장식한 모르는 사람의 담장 위
그런 게 수치고 몰락이겠지요 무거운 언어들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때 사라지지 않는 귀신들도 챙 넓은 모자를 씌워 여름 한낮 시장으로 마실 가고 싶은 시절
포도의 껍질은 검고 알맹이는 푸르고 달콤해요
한 알 한 알 오래 따먹었습니다 배부르지 않는 감정을 다 먹어버려서 뼈대만 남았습니다
눈물도 한 김 식혀 서늘해야 상하지 않는 계절입니다
손가락도 입술도 희게 펼친 치마도 모두 빠지지 않는 색으로 물들었지만
―《아토포스》 2022 겨울/창간호
이용임 시인 / 시계의 집 순결한 네 이마에서 불온한 자궁의 무늬를 읽는 건 우연이 아니야 녹슨 시계덩어리 심장 그게 바로 너야 말랑한 숨결이 비린 건 아직 밤이 깊지 않아서 갓 태어난 지문이 희미한 건 아직 이야기가 깨어나지 않아서 내가 밤마다 네게 불러 준 노래를 기억해 몸에서 몸으로 물려준 감각을 기억해 기억해 여자여 어린 여자여 희디흰 살결에 붉은 입술을 지녔지만 언제나 독에 취해 잠을 자는 여자여 내 몸에 더운 무덤을 만들고 파도에 젖은 분침 소리로 내게 인사한 여자여 네 심장 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네 왜 기억은 관절마다 둥지를 트는지 왜 나는 시효 만료된 순간들이 검은 낯짝을 치켜들고 웅성거리는 집단거주지인지 피투성이 시계덩어리 심장 그게 바로 나야 기억해 우리에게 밤은 까마귀 날개가 창궐한 묘지라는 걸 몰려오는 시간을 염하고 묻는 장의사이자 숙성된 뼈에 밀어를 새기는 도굴꾼이란 걸 여자의 시간은 멈추지 않아 여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아 기억해 저녁 종소리를 마시고 잉태한 나의 여자여
이용임 시인 / 오수 내 안의 황폐 위 한 줄의 파랑으로 눕는다 그건 수채화 같은 기분 태어나기 이틀 전의 프랑켄슈타인 같아 관에서 발굴한 심장으로 두근거리며 돌아오는 일 속눈썹은 무겁고 피들은 어금니를 물고 으르렁거리지 사람들은 알까 몰라 살면서도 몇 번씩 죽음을 건너는 걸 경계 없이 몸을 잃는 자발성 사람들은 알까 몰라 이토록 본격적인 자살을 무관의 임사 체험을 잠시 죽으러 갑니다 인사도 없이 깜빡, 어머 나 잠시 졸았나 봐 잠시 죽었나 봐 잠시 다른 생을 기웃거리고 왔나 봐 죽음의 자궁에 깃들었다 하얗게 표백되어 세상으로 다시 쫓겨나는 일 거듭, 출산 속눈썹은 무겁고 최초처럼 우울한 모습으로 죽음을 들락거리며 늙어가는 일 그걸 우리는 잔다,라고 하는가 봐 산다,라고 하는가 봐
이용임 시인 / 하마르 손금과 입김을 남기고 떠나자 유리의 색이 남았습니다 한때 거품이었던 것 한때 무지개였던 것 오후의 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미지근한 단맛만 남을 때까지 아릿하고 고요합니다 비었으나 단단한 이것은 예수의 허벅지 뼈일까요? 목에서 맑은 바람이 쏟아집니다 너머는 푸르고 흰 천국이고 유리의 이마는 혈관이 많아 미지근합니다
이용임 시인 / 이웃에 사는 새
이웃에는 새가 산다 검은 파란 노란 새하얀 새가 산다 부리가 긴 부리가 뭉툭한 부리가 휘어진 부리가 날카로운 부리가 부러진 새가 산다 아침마다 창문 유리에 얼룩무늬로 흘러내리는 새의 울음소리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비가 내린다 꽃대궁이 흠씬흠씬 꺾인다 간밤엔 젖은 손수건을 내 창으로 힘껏 던져 온 집안의 유리가 흔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귓바퀴가 간지럽다 호외를 알리는 소년이 뛰어간다 속보는 조류의 세계에 치명적인 독감이 번지고 있다고 알린다 생강을 끓인 차에 꿀을 넣어 마신다 우울증으로 눈이 얇아진 새가 기침을 한다 말린 꽃 한 다발을 택배로 보낸다 우유 투입구로 넣어주세요 전화를 끊으며 나는 투입구가 없는 문을 바라본다 커튼 너머 창문 너머 나무 너머 도로 너머 허공 너머 이웃에 사는 새가 운다 페루에서 온 구름에서 온 새 시장에서 온 일요일에서 온 우기에서 온 나무 의자에서 온 새가 운다 새장에서 침대에서 벽 속에서 옷장에서 거울에서 묘혈에서 새가 운다 전등갓 처럼 식탁보처럼 서랍처럼 헤어진 애인의 칫솔처럼 벗어놓은 양말처럼 새가 운다 손가락이 긴 손가락이 가는 손가락 마디가 굵은 손가락에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이 네 개인 나의 이웃은 새를 기른다 남자인 여자인 어린아이인 노파인 처녀인 시체인 나의 이웃은 새를 기른다 메마르고 딱딱한 분절음으로 새는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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