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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 / 돌아보면 뒤가 파란
노란 꽃 속을 돌아다녔다 거친 계단을 만났다 갑자기 가슴이 볼록해졌다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았다 꿈속에서도 거짓말을 했다 솜털처럼 복슬복슬, 부드러운 칼이 이봐, 여긴 내 침대야! 곤두서서 외쳤다 거미줄에서 만난 남자와 두 손을 잡고 몸을 비비 꼬며 기도를 했다 냄새가 났다 땅속으로 들어가 여왕개미가 알을 낳는 풍경을 오래, 구경했다 내 실크로드에는 개미들만 오갔고 나는 그들의 검은 발자국을 베고 누워 오줌을 쌌다 아주 따뜻한 강이 흐르는 듯했다 한밤중엔 무릎을 꿇고 앉아 지난 계절의 이름을 불러보거나 빙그르르 돌면서 춤을 췄다 가끔 눈 속으로 별이 떨어졌고 아침이면 눈을 떠 별들의 시체를 꺼냈다
박연준 시인 / 빈센트
미쳐 죽게 해주세요 날뛰다가 모가지가 뒤틀려 죽음이 꾸역꾸역 밀려오게 해주세요 온몸 구석구석에서 펌프처럼 피의 줄기가 터져나오게, 내 모든 시간과 기록이 소진되도록 하염없이 죄를 지으며, 죄에 깔려 죽을지라도 뱀을 보내주세요 시커멓고 차가운, 거대한 뱀 (미끄러운 발작!) 뱀의 입속에 난 두 갈래 길에 다리를 한 짝씩 올려놓게 해주세요 길이 달리면 다리가 찢어지고 내가 두 개가 되게 해주세요 하나의 나는 빨갛게 또하나의 나는 검게 해주세요 둘이 서로 침 뱉다가 영영 돌아서서 딴 길 가게 해주세요
죽도록,
붓을 들고 있고 싶어요
시앤, 뱃속이 텅 비어 벙어리가 된 시앤 네 썩은 입술 사이로 꽃잎이 진다. 봄이 와서 급성으로 죽음에 이르는
박연준 시인 / 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탈탈 털어 죄다 갖다버린 그늘에는 무릎에서 떨어진 딱지도 있고 취한 아버지가 내 이름을 오래 부르다 고꾸라져 잠든 밤도 있고 걸음, 뒤틀린 다리를 끌고 사라지던 여름도 있다
뭉뚝한 연필, 가느다란 연필, 부러진 연필로 새벽의 어깨선을 열심히 그리던 시간들도 모두 모두 갖다버렸다
버렸더니 살겠다 내가 나를 연기하며 (시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연기를 하며) 그늘을 기억하는 일과 들어가 사는 일 사이에서 도르래를 굴리며 살 수는 있겠으나
이미 태어난 슬픔은 악다구니를 피해 여전히 질투 나게 말랑한 누군가의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붉고 끈덕지게 새끼를 치고 나는 멀리에서 가벼워진 몸, 이라 생각하며 포기, 포기, 포기하겠다고 눈을 감지만
어느 새벽 방바닥에 앉아 발가락을 만져보니 열개의 잘린 술래들 벙어리가 되어 입을 벙긋거리는 술래들이 나를 본다
도망가봤자 소용없어, 아름다운 그늘!
박연준 시인 / 하품
마음이라는 게 아주 작게 접으면 접힐 수도 있는 것인데 자꾸 활짝 피고 싶은 꿈을 어떻게 한다?
창문에서 맞은편 담벼락까지 허밍으로 날아가는 라일락 꽃잎
도착하지 않기로, 그저 날아가다 사라지기로
박연준 시인 / 꽃 필 때 같이 잤다
추락할 줄 알면서 날아가는 연鳶의 의지 봄은 난청이다
휘청대는 것은 잠이 아니다. 잠을 나눠가진 연인들의 조약돌
욕실 바닥을 기어가는 하루살이는 더듬더듬 날개를 잊고, 날벌레는 죽을 때 되면 기어가나?
그 작은 등에 내 전부를 얹어볼까 가벼이, 다시 돌아가 날아볼까
거꾸로 보면 바다의 하늘은 바다 하늘의 바다는 하늘
박연준 시인 / 환청
새벽에 양배추를 데치며 뜨거운 물에 몸 푸는 식물을 관찰한다 식물은 비명이 없어서 좋다 색이 변하는 순간조차 고요하다
기다리는 일은 허공을 손톱으로 조심조심 긁는 일 어디까지 파였는지 상처가 깊은지 가늠할 수도 없이
이상하다 밤마다 휘어진 척추부터 꼼꼼히 흔들리는 누군가의 숨죽인 흐느낌이 들린다
박연준 시인 / 이별에 관한 일곱개의 리듬 1 사과에 내리는 붉은 빗방울들 둥그런 능선을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가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을 몇번 했을까, 사과나무는 2 당신의 수염 얼굴에서 자라는 뿌리 내가 매일 잡아먹는 달빛들 3 코스모스는 가을에 핀 키스들 잠정적으로 잠정적으로 살아 날뛰는 이별들, 4 발 없이 걸어다니다 들킨 지네처럼 어느날 갑자기 당신이 늙어도 막무가내로 걸어나가는 생(生)을 잡을 순 없지 5 붉은 색연필로 당신의 테두리를 그리다 입술 주름에서 빨강을 부러뜨리겠다 치켜올라간 눈꼬리, 그 기울기가 내 길이다 서툰 날짐승들이 배를 끌고 지나다니던 돌멩이들이 날아와 내 속눈썹을 빻는 밤 종이 위 다섯개의 무덤을 짓고 기억을 해독하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부숴 먹겠다 6 흰 장송곡들의 종착역 가난한 사람들의 뒤꿈치가 모여 자는 곳 목이 쉰 남자들이 목적을 잃어버리는 곳 무덤 위에 내리는 눈은 무덤의 무덤 7 가는 사람 이승에서의 마지막은 포도상자를 손에 들고 가는 뒷모습이었지 흔들어볼 팔도 없이은늘어볼 팔도 없이 눈과 등이 전부였던 사람 늘 반달만큼 모자랐던 포도 향에 팔려 먼 곳으로 아직도 가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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