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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영란 시인 / 발효 커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4.
조영란 시인 / 발효 커피

조영란 시인 / 발효 커피

 

 

구별할 수 있겠어요?

오리지널 커피와 발효 커피의 차이를

 

발효 커피가 더 깊은 맛이 나는 것 같아요!

같아요라는 추정은 얼마나 도피하기 쉬운통로인지

피식 웃다가 숙성되지 못한 채

시간만 끌고 있는 나의 문장들을 생각한다

 

수백 개의 낱말들을 커피콩처럼 새까맣게 들볶아

펄펄 끓는 세상에 뛰어들게 하는 것

진하게 우려내는 것

문장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지

 

발효되기 위해 애쓴 흔적

다양성을 맛보다가 속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 풍미를 기다리다 내가 먼저 휘발되곤 했던 시간들

 

구별할 수 있을까?

오리지널 커피와 발효 커피의 차이를

 

역시 난 커피 맛을 몰라

몰라도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꾸만 딴 생각이 난다

라테라던가 믹스커피 같은

 

-시집 <오늘은 가능합니다> 중에서

 

 


 

 

조영란 시인 / 심부름

 

 

 사람을 따라가다 길을 놓쳤고 길을 따라가다 사람을 놓쳤다. 도착지를 몰랐지만 알게 된다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게 될까 봐 지나온 발자국을 지웠다. 입간판에 홀려 따라 들어간 가게만 몇 군데인지 모르겠고. 심부름이 뭐였지? 골목은 복잡하고 기분은 넘쳐나고. 방향을 틀어도 될까? 발끝을 들고 절벽에 서 있는 것처럼 뛰어내리지 못한 생각들이 골목을 돌고 돌았다. 누가 시킨 건지도 모르는 두부 같은 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조영란 시인 / 오늘은 가능합니다

 

 

언제나 세계는 세워둔 벽을 시름했으므로

 

 이제 우리가 뛰어넘을 차례입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생각해봐요

 

 벽이 사라진다면

 미래로 통하는 곧은 선과 길들이 있는* 문이 열린다면

 

 오늘은 가능합니다

 

 경계를 지운다는 것은 얼마나 환한 일인가요

 

 용기를 주고받았으므로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거죠

 

 시간이라는 욕망의 끝은 멈춤이겠지만

 걸어보지 않은 길이 있어서 희망은 뛰어가는 거예요

 

 좁은 골목 끝에 서서

 삶은 자꾸 오라 오라 하고

 

 그러니 우리 걸음을 아끼지 말아요

 오해와 진실이 각자 다른 곳에서 넘어진다 해도

 ​

*헤르만 헤세, 「데미안」에서

 

-시집 <오늘은 가능합니다>에서

 

 


 

 

조영란 시인 / 잉어의 시간

 

 

죽은 잉어를 품은 연못은 투명한 무덤 같다

 

갈대가 서둘러 썩은 몸을 수습하고

벚나무는 꽃잎을 떨궈 수의를 해 입힌다

물결을 뒤집어쓴 잉어의 비늘은

좀처럼 젖지 않는다

죽은 잉어의 몸에 들어앉은 연못

지금은 슬픔을 양생(養生) 중이니 아무나 들어오지 마시오

고요히 차오르는 슬픔의 무늬가

물 밖

내 머릿속을 물들인다

 

얼마나 살을 발라야 다시 떠오를 수 있나

 

있는 힘껏 가라앉아

고통의 밑바닥에 몸을 맡기는 잉어

 

경외(敬畏)란 그런 것이다,

마지막 남은 살점까지 다 털어주고

홀로 입관(入棺)하는 것

그리하여 홀로 깊어지는 것

 

잉어의 시간은 지금부터다​

 

 


 

 

조영란 시인 /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을 펼치면 비문의 세계가 열린다

 

단락을 나누듯

짧은 기침 몇 지나고 나면

발작적으로 뛰는 심장의 운율

자리를 바꿔 앉은 감정의 오타 같은 것

 

몇 병의 취기로도 잠들 줄 모르는 기억은

텅 빈 가슴을 채우며 빼곡해지는데

붉게 표시해둔 우울은 성급한 나를 위한 선물이었으리

 

한순간도 당신인 적 없던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상투적인 농담들을 지우고 나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민낯의 그늘

 

행간에 빠진 것은 침묵일까

열린 결말은 언제 닫힐까

 

쏟아지는 질문 앞에서 나는 자꾸 문맥을 잃어버리고

끝내 마침표를 찾지 못하고

어디쯤에 밑줄을 그어야 하나

 

좀 더 그럴듯한 결핍을 위해

열렬히 실패하며 스스로 정물이 되어버린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조영란 시인 / 조율

 

 

어제의 너와 오늘의 내가 달라서

우리는 매일 어느 한쪽이 기운다

 

속도를 잃은 바퀴처럼

왜곡된 사랑이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는 시소위

 

네가 뜬구름을 잡으려 할 때마다

나는 바닥에 방점을 찍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놀이

일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서로의 손 대신 시소의 손잡이를 잡고

 

점점 커져가는 기울기

비대해진 우울을 덜어내고

농담을 건넬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워지면

우리가 수평을 이룰수 있을까

 

다가갈수록 흔들리는 중심

나의 비관과 너의 낙관이 나란해졌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닐 것

평화라고 말하고 싶은 권태일 것

 

-시집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중에서

 

 


 

 

조영란 시인 / 그날 방바닥에 떨어진 먼지 한 움큼이

내겐 가장 진실했다

유통기간 지난 추억들이 쏟아져버린 편지함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차마 버리지 못한 편지들이 먼지와 함께 떨어져 내린다

쓸데없이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

먼지와 함께 방바닥에 나뒹군다

반쯤 뜯겨나간 수취인은 아직도 불명이다

마음속 우체국은 너무 멀다

먼지를 아껴야 할 때가 있다

오래된 먼지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함부로 건드리면 푸른 비밀이 드러난다

편지봉투의 입이 무거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깊이 닫아두었던 문장들이

손끝에서 눈을 뜬다

이 오래된 편지들을 어떻게 다 읽어야 할까

버리지 않는 한 스스로 저를 지우는 기억은 없다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날 방바닥에 떨어진 먼지 한 움큼이 내겐 가장 진실했다

 

 


 

조영란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자 대학교 졸업. 2016년 월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에 「지폐의 감정」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를 아끼는 가장 현명한 자세>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