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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경 시인 / 전화기 속으로 내리는 비
진동으로 부르르 떠는 전화기 속에 갇힌 참새 날개를 파닥거린다 날개에 부딪히는 액정 부리가 콕콕 쪼을 때마다 투명한 어둠에 금이 간다 금간 틈으로 말소리 새어나온다 말소리에 몇 점 구름이 묻어있다 구름 속에서 빗방울들 두 눈 꼭 감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허공으로 뛰어내린다 비의 가랑이 나뭇가지에 걸린다 걸터앉은 엉덩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푸른 이파리들 이파리들 진저리 치자 빗방울은 번지점프를 한다 별이 와르르 쏟아진다 울리는 벨소리에 폴더가 열리고 말들 날아오른다 날갯짓 사이로 떨어지는 자음 모음들 보랏빛 제비꽃으로 톡톡 피어난다
정수경 시인 / 그리운 사막
푸성귀 몇 줌 둘레에 진설하고 속눈썹 긴 꼽추가 아파트 입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발길들 낙타 같은 그녀를 힐끗거릴 때마다 종이박스 위에서 푸성귀들은 시들었다 늘 응달인 그녀의 자리를 아파트 불빛이 야금야금 삼키고
산기슭 재개발지구 슬레이트집을 포클레인이 허물고 난 뒤 공원 안 공중전화 부스는 그녀의 새로운 잠자리가 되었고 잠든 그녀의 혹에서 검은 슬픔이 바닥으로 흘렀다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을까 지난밤 내린 봄눈에 낙타는 제 혹을 안고 혼자만의 사막을 건너간 모양이었다
군용담요 밖으로 나온 오른손이 꼭 쥔 아라비아숫자 수화기가 건들건들 읽다말다 하는 동안
구청직원이 작성하는 행려병자 처리 서류에 흘려 쓴 글씨가 그녀의 굳은 몸을 손수레에 거두어 싣는다 바람은 뒷짐 지고 딴전을 부린다
세상을 내려놓은 뼈 없는 몸이 흘러가 닿은 사막 여자의 몸에서 발굽 닳은 낙타들이 걸어 나온다 공원 나무들이 푸르르 몸을 털자 그녀가 걸어 나간 세상을 잔설이 낙타를 배웅하는 모래바람처럼 내려덮는다
<다층> 2009년 봄호
정수경 시인 / 붉은 꽃말
유월에 당신은 붉은 장미를 가장한 말의 이면에 대해 연연해서는 안 된다
잘 맞는 옷 입은 말은 어이없이 저쪽 담장에서 되돌아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발설되지 못하고 입술에 선명하게 남은 꽃말의 보송한 날개에도 때로는 가시가 돋는다
그러나 말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으므로 물 위에서 지워진 새의 발자국처럼 가시는 부드러워져야한다
뿌리 없이 무성한 말은 투명한 물방울무늬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무렵을 떠올리고
말의 잔치는 향기로운 꽃의 나날 검은 해가 꽃 피는 시절의 향기를 거두어 쓸쓸히 서쪽으로 쓸어간다
입술 기억하는 핏빛 말들이여, 허공을 떠돌다 떠돌다 적당히 무른 곳 찾아 밑줄 아래 그만 앉아 있으라
바람이 수시로 말의 그늘을 흔들고 구름은 발효된 침묵의 비를 뿌리며 지나가느니
시침과 분침이 유행처럼 지나가는 길목 어느 심장 지나온 꽃말이 장미의 種을 흉내 내고 있다
정수경 시인 / 줄탁啐啄
허공을 품은 죄로 나는 백 년 동안 부화되지 못했습니다 껍질과 실랑이 끝에 깨어나면 흠뻑 젖어 있곤 했지요
열망의 열쇠를 쥔 날개가 뷰박스 필라멘트처럼 푸드덕거렸습니다
껍질의 조밀한 실체를 풀기에는 내 견고한 힘줄이라도 역부족이었습니다 번개와 새떼가 번갈아 나타나고 날씨보다 풍향계가 먼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의 기억은 고여 있는 죽음의 정석이라는 강물의 변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턱을 괸 동공 속에서 새들의 행방을 좇아가던 궁리가 하릴없이 구름의 꽁무니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새들 길들이던 바람이 구름 등을 밀어 전달한 면죄부에 대한 모호한 기별이 맞춤형 소각장에서 흘러나오는 불티에 발목이 걸려 넘어지곤 했지요
날개에 이끼를 키우며 부화를 거절하던 시간이 타협 쪽으로 자리를 바꾸고 틀어 앉았습니다
폭우의 밤에 목을 매고 비상의 순간을 기다리던 시간 겨드랑이가 비로소 간지러워지고 있었습니다
정수경 시인 / 챈들러 방식으로
옆구리 걷어차인 빈 밥그릇을 바라본다. 식탁에 차려진 요리들은 늙었고 나는 내가 쓸 연필을 잃어버렸다. 수사적 음률로 흐르는 오후의 희망곡이 오전의 꽃잎으로 열린다. 막 내린 대본에서 빌려온 개털 박힌 사슬로 퇴행 징후의 마당을 묶어놓으면, 마당에서 걸어 나온 연애편지는 북북 찢기며 누런 이빨을 드러낸다. 소나기 한바탕 지나간다. 쪼그려 앉은 웃음이 부르르 빗물을 털어낸다. 실눈 뜬 바람이 등을 토닥인다. 나는 ‘바람에게도 예의가 있다’라고 쓴다. 드러누운 가로 두 줄이 바람의 예의를 빨갛게 훔치고 있다. 손가락 지문으로 잃어버린 연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머리 아픈 궤변 몇 구절 다녀간 뒤 데페이즈망 기법이 질문의 몸뚱어리를 비튼다. 파란 생각의 돌 하나 빼낸다. 물을 퍼 나르는 그림자가 공간을 채색하듯, 어스름한 둔덕을 찾아낸 고양이 나를 모방한 발톱으로 바람의 뼈를 낚아채고 있다.
정수경 시인 / 최북崔北
축시(丑時)의 먹물 속 몰아치는 눈보라 뚫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훨훨 나는 새 칠칠(七七) 붓 입에 물고 날다 툭, 떨어뜨린다 짖던 개가 받아 삼킨다
성벽 아래 잠든 그는 화선지 바깥이 안방인 양 불기 없는 한데가 오히려 아랫목 웅크린 잠을 안고 흰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다
한쪽 눈 찔러 거기에 태양을 심었다 빛이 뿌리 내리고 붓끝 따라 가지를 뻗어 산을 세우고 강을 만들고 구름을 띄워 새가 날고 새벽을 불러 안개 속에 길을 내면 한 세상이 저문다 한들 종이 한 장보다 무거우랴
술 한 병과 두부 한모에 그림을 바꾸던 그가 벽 없는 집으로 돌아간다, 훨훨 살을 에는 바람 붓끝에 묻혀 댓잎에 눈발 날린다 칼바람을 쏟아낸다 불을 삼킨 뜨거운 언어들이 먹물에 몸을 녹여 구만리 긴 하늘로 잠겨가는 새 훨훨 칠칠(七七) 훨훨 칠칠(七七)
검푸른 북명(北冥)의 바다 한 마리 곤(鯤)의 꿈이 얼음장 밑에 슬프다
정수경 시인 / 상처를 사육하는 법
구름 내부에는 밀고 당긴 어깻죽지의 상처가 있다
예고 없는 구름의 부피는 상처가 사육하는 우울의 왼쪽
불빛 몇 줌은 어둠 속을 적색 광선으로 달리고 쏟아지는 비는 빗속을 구름의 무게로 달린다
내가 쓴 편지를 내 몸 속에 집어넣는다 비의 날을 모르던 네가 표정 잃어버린 얼굴로 빗속을 건너오듯, 새총으로 고요를 당겨 붉은 비행을 쏘아 올린다
붉다는 것은 제 속 죽어가는 것들을 수놓고 있다는 것 구름 내부를 왼쪽에 앉힌다는 것
이마를 짚은 생각의 그림자가 순한 골목 돌아 나오면 생선가시처럼 드러난 햇살로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우울의 은신처를 지운다
유리창 너머 표류하는 구름 모서리들이 떨어져 내린다 나를 빠져나오지 못한 편지는 마지막 식물성 잃어버린 몰약의 계절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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