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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원 시인 / 람부탄*
붉은 빛깔은 흰 접시 위에서 약간 젖은 채 발랄하다
처녀에서 나오지 않는 둥근 몸을 부드러운 털이 감싸며 아무렇게나 터져버리지 않으려고 단단하다 쉽게 벗기지 못하여 나이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나는 비윤리적이고
완고한 솔기가 툭, 벌어질 때 동그란 방 하나 당돌하게 빠져 나올 때
싱싱한 어둠은 은밀하게 녹아들지
접시는 침들이 고이는 세계 혓바닥들의 세계
테이블 위의 감정들이 시럽으로 흐르고
나는 생크림으로 만든 케이크가 될래 벗기지 않은 너를 토핑처럼 푹푹 박을래
*말레이지아가 원산지인 열대과일
장요원 시인 / 드라이플라워
해를 보면 자꾸만 어지러워 거꾸로 매달렸다 꽃대가 밀어올린 향이 오르던 그 보폭으로 흘러내렸다 향기의 내용이 다 비워지기까지 붉어진 시간만큼 외로웠다 문득, 유리병 속을 뛰어내리는 코르크 마개의 자세가 궁금했다 핑킹가위 같은 비문들이 잘려나갔다 창백해졌다
소소한 바람에도 현기증이 난다 무릎이 잘린 낯선 걸음들이 유리문을 지나갔다 유리에 서성이던 웃음들이 싹둑 잘렸다 통점은 훼손된 부위가 아니라 향기의 왼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붕대처럼, 향기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나팔꽃을 본 적이 있지 그들의 심장이 왼쪽에 있을 거라는 편견도 흘러내렸다
내력 없이 내리는 안개비에도 쉬이 얼룩이 번진다 허공이 우산처럼 접히고 있다 홀쭉해졌다
장미의 유전자를 가진 나는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고,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할퀴었다 가시와 향기는 다른 구조를 가진 같은 슬픔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몸속에서 너라는 물질이 다 휘발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바로 설 수 있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벽에 걸린 캔들 홀더 속 검은 심지가 잊어버린 어제를 켜고 있다
장요원 시인 / 무반주 첼로소나타
현들이 공중에 매여 있다
빼곡히, 수직의 자세로 허공의 천장과 바닥을 잇고 있다 그 탄력을 터뜨리는 지상의 수많은 손가락들
빗방울의 형식으로 음표들이 터진다
비의 음계는 동물성일까요 우우 우짖는 소리 맹렬하게 열어젖히는 성대들
단풍나무의 무수한 손끝에서 울음이 흘러나오고 담장 밑에서 고양이의 신음이 끊어졌다가 이어진다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담쟁이넝쿨의 왼손과 오른손들,
지붕들은 범람하기 위해 솟고 있는 걸까요
팽팽하던 공중이 느슨해지자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폐활량을 늘리기 시작한다
소리의 계단 뒤에는 내밀한 골목 하나 들어 있지 지루한 골목은 낡은 연인들이 헤어지기 쉬운 배경 길게 내린 그녀의 속눈썹도 슬픔에 매여 있었지
저녁이 낮은음자리로 몸을 낮추는 시간,
호흡이 느려진 후렴이 긴 목울대를 향해 강 쪽으로 흘러 간다
장요원 시인 / 숲
헐거워진 벽에 매달린 뻐꾸기 둥지에는 알이 없다 울음이 열릴 때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시간들만 튀어나온다 고개를 내밀고 우는 저 환지통 목청이 터질 때마다 늙은 시간들이 사라진다
부화되지 않은 시간을 떠서 세안을 하고 뻐꾸기가 내어놓은 숲길을 걷는다 발자국 뗀 자리마다 소리가 고여 맑아지는 수위水位가 있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날 때도 꾹, 백화점 바코드에도 꾹, 소리를 다 소비하고 돌아와 다시 충전하는 몸들
울음이 부리를 침대에 묻는 시간, 현관 신발엔 하루치의 울음이 단단히 묶일 것이고 어둠은 캄캄한 잠을 품고 있다
이미 떠나간 시간들, 낯설지 않은 울음의 횟수가 집안을 울린다 시간이 날아다니고 부화되고 있는 숲이 뒤척이고 있다
장요원 시인 / 우리는 얼룩
창으로 들어온 순한 햇빛이 꽃무늬 벽을 타고 나비의 자세로 어룽거린다
유리는 투명하고 객관적이지 투명한 바탕 위에 날개의 감정이 헛딛는 것처럼 약속이 비켜나간 손가락들 틈에서 얼룩이 자란다
온통 얼룩을 기워 입고 사는 말을 본 적이 있니? 얼룩말의 눈빛을 기억하니? 얼룩과 얼룩 사이에는 경계가 살지 두려움은 얼룩 속에 숨어서 자라나고 두려움을 먹고 얼룩은 화려해져서 얼룩을 입은 사람들로 세계는 번져가네
TV 화면에는 모자를 쓴 여인이 모자이크를 들썩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울먹인다
축축한 물질들은 쉽게 어두워져 안으로 스미는 습성이 있지 울음의 속을 뒤집어 보면 끝물 같은 흐느낌이 묻어나올 것 같아
오늘의 날씨는 구김이 많고 신축적인 페이즐리 패턴이라고 했니? 날씨에 상관없이 우리는 약간의 울음과 무늬가 필요해
사람들의 손에는 매일 매일 클렌징크림이 들려 있지
장요원 시인 / 운동장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돌고 있다 걸음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나도록 돌고 있다 남자가 큰 보폭으로 뛰면서 여자를 반복적으로 앞지르고 있다 플라타너스들이 시계의 숫자판처럼 꾹꾹 박혀 있다 추 모양으로 주먹을 꼭 쥔 사람이 지나간다
척추를 바짝 세우고 양팔을 앞뒤로 저으며 지나간다 모르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인 양 다정하게 뒤를 따르고 같은 방향으로
운동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그네를 탄 아이가 운동장을 힘껏 밀었다 당겼다 한다 모래시계 같은 자세로 철봉에 매달린 남자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운동장을 뒤집는다
플라타너스와 플라타너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줄기가 밤을 잘게 썰고 있다
장요원 시인 / 허공의 사생활
나무들이 손가락 모양으로 길어지고 간략해졌다 손톱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그늘이 벌겋다 공중이 핼쑥해졌다
단단해진 공중을 뜯고 나온 꽃망울을 따라 나온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은 장미의 기분이 아니야
구름을 탕진하는 일은 바람이 관여한다 해도 그것은 허공의 권리, 구름의 성분이란 죽은 새의 울음과 기억이 빠져나간 그을음 그리고 물컹거리는 무릎들 빗방울에서 저녁 냄새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지
어제를 잊어버리기 위해 눈송이들은 하얗게 태어나네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골목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리다가 하얘지다가 눈과 입술을 두고 사라졌다.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눈사람 속으로 들어가 부풀었다
장미의 몽우리가 점점 진해지자 어둠이 허공을 닫는다
담장이 그리운 장미가 공중의 허벅지를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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