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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일림 시인 / 불꽃의 눈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4.
이일림 시인 / 불꽃의 눈물

이일림 시인 / 불꽃의 눈물

 

 

여자의 온 몸 위로 눈이 내렸다

눈은 떨어지자마자 굳어갔고

차가운 몸을 뜨겁게 감싸 안듯 하얗게 쌓여갔다

바람을 막던 사람들은

비명처럼 아픔처럼

여자의 몸과 함께 붉게 물들며

피날레 장식을 엄숙히 바라보고 있었다

 

각설이 타령을 마친 남자가

108개의 묶음 양초에 불을 켤 때

여자는 속곳으로 정히 단장하고

불꽃의 하얀 심장을 가만히 안았다

바람의 맥박이 거세게 뛰었다

구름이 목이 메어 잠시 햇빛을 잡을 때

눈물인양 촛농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에워싼 사람들이 달궈진 심장을 바람에 말린 후

눈은 서서히 녹아

여자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울음 담긴 눈물 통이 출렁이고

촉루의 물리요법이 어깨로부터

착잡하게 엉킨 상처를 풀듯이

사람들은 동여맨 두 팔을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이일림 시인 / 침묵 2

-연자육

 

 

 적막을 관할하는 고수를 알고 있죠.

 

 새알처럼 생겼지만 어미는 꽃이에요. 전생은 땅속의 잠자는 공주, 이천 년 삼천 년도 거뜬해요. 누구에게도 개방하지 않은 신전엔 튼튼하고 푸른 세계가 숨 쉬고 있어 간혹 심장이 나약한 사람들이 그의 혈맥을 찾곤 해요.

 

 탕, 적막을 망치로 내려칠 때 거북의 등으로 달리던 타조들이 알을 낳아요. 아이들이 사막에 모여 공깃돌놀이를 하고 시간은 회오리로 떼굴떼굴 말려요.

 

 신기루에 올라서서 똑똑 물의 방에 노크를 하면 얼굴을 붉히며 공주가 일어나요 껍질의 고고함이 물의 순수함과 만나는 연화 현상을 사람들은 공주의 눈부신 첫사랑 혹은? 붓다의 실연이라 일컫는다는데

 

 나에게 불이었던 적 있는 당신.? 밤이 되면 가끔 침묵은 그림자를 열어 꽃으로 태어나는 꿈을 꿔요. 전통을 고수하는 진흙의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는데

 

 당신의 향기로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하모니가 소란스러워져요. 이제 무색무취로 얇게 저며진, 저 적막이 뿜어내는 위대한 침묵의 열변을 들을 차례예요.

 

 


 

 

이일림 시인 / 동동 구르는 산

 

 

 학이 메아리를 가지고 춤추는 동안,

 

 성대를 아끼는 겨울이 성큼 다가왔지. 산은 직접 말하는 법을 몰라 산새들만 흐드득 흐드득 날밤을 세지.

 

 질질 끌려가는 아침의 여름을 본 위장(僞裝)은 벌써 가을의 모가지를 젖히고 참혹의 눈길을 오르지. 웃통을 벗은 사람들이 가면극을 찾으러 산맥의 무대 뒤를 뒤진다.

 

 한 번도 구름의 손목을 잡아주지 못했어요. 아이는 물가에서 회오리처럼 울고.

 

 바람이 몰아치자 모감주 매실주 앵두주 차례로 빨갛게 출렁거리는 그녀의 방, 아무도 없네.

 

 시간이 그림자를 꺼내어 긴 메아리를 산의 정수리까지 끌어올리는 동안

 

 말문을 연 듯 활활 낙엽을 떨어뜨리는 날개들의 슬픈 수화. 들리지 않니?

 

 말의 뒤통수가 시린 엉덩이를 들고 굴러간다.

 

 말을 쓴 모자가 굴러간다. 말의 열쇠를 매단 산이 동동 굴러간다.

 모자와 산을 떠메고 털이 뽑힌 채 산의 메아리 날아간다. 날아간다.

 

 산 너머, 다시 오지 않는다. 거기 누구 없는가.

 

 우리는 어디쯤서 말똥구리처럼 굴러가다가 멈출 수 있을까.

 

 


 

 

이일림 시인 / 통점

 

 

 고래들이 집단 자살을 시도했다 수십 마리가 일시에 바다를 버리고 모래사장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한 것이다 통점(痛點)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덩치들을 바닷속으로 밀어넣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땅을 버리고 바다로 가는 사람과 바다를 버리고 땅으로 오는 해양 동물이 우주를 둘러싸고 삼각관계를 펼치고 있다 두뇌를 쓰는 동물들은 어딘가에 통점이 있다는 것일까 죽음 앞에서 이를테면 바다가 땅이고 땅이 바다라는 말, 모태의 본능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다만 우주 안의 공간이라는 것인데,

 

 며칠 전 뉴스에서는 아들과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부정이 있었다 아버지는 퍼렇게 독이 선 세상의 핏발을 여린 아들의 가슴에다 꽂은 것일까 아들은 그 피의 깃발을 들고 바닷속을 길길이 날뛰며 붉디붉게 물들였을까 세월을 기다리기에 지쳐버린 독단 전횡, 서럽게 죽어야 하는 생명 앞에 우리는 무엇이기를 갈망하여야 할까 저 생명의 푸른 이끼 같은 발포적인 독은 외로운 바다를 물들이고 사람을 물들여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는 삶의 자만을 스트랜딩으로 추스르는 중이다

 

-시집 『비의 요일은 지났다』 시인동네, 2015년

 

 


 

 

이일림 시인 / 매운 소스

 

 

눈병이 난 거라고 생각했다, 다중적인

 

곰국에 넣을 파를 그냥 다듬고 있을 뿐인데

어머니가 든 회초리는 맴맴 고개 너머 보이질 않는데

사방에 봄소식 그렁그렁 밀려오고 있는데

내 눈을 둘러싸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양쪽 눈을 실명한 한 사람을 떠올린다

울음은 멀고 깊은 데서 오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그 백지의 거리에서

 

바람의 심장이 흘려보내는 욱신욱신 매서운 물결

눈은 너무 결백한 성정을 가진 것일까

깨끗함이 주는 더러운 슬픔을 만끽하고 싶은 것일까

세상을 볼 수 없어 새하얗던 내 얼린 어는 날에도

눈물이 펑펑 내린 적 있다

 

늦은 겨울이 삼월을 안고 눈을 퍼붓는다

 

-시집 『비의 요일은 지났다』 시인동네, 2015년

 

 


 

 

이일림 시인 / 해동

 

 

어둠은 햇살의 그림자를 키워

제 가슴에 안는다

 

그늘의 이끼 위에 앉은 통점들

행성의 탈주를 꿈꾼다

송광사 앞마당 법고 소리 울릴 때

 

햇살이여,

저 말들을 풀어놓고 어디로 가셨나

 

초원의 휘모리장단 추임새 사이

푸른 말들 히잉히잉 날뛰다

갈기 다듬으며 제집에 들듯

 

생의 우회로만 돌다

가까스로 찾은 길에서 그대를 보는 느낌

 

백야에서 흑야로

감칠맛 은은하게 도니

이 이월의 바람을 가지려 해,

 

큰 북의 맥놀이에 더 큰 힘이

어둠을 잘게 부수어 바람에 날린다

 

외로운 사람들

어느 먼 나라의 자기장을 타고

소박하게 따뜻해지는 순간,

 

어느새 위치가 바뀐 목백일홍

맨몸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지상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빙하로 떠다니던

오래된 붉은 섬, 달빛에 녹아내린다

 

ㅡ『시인동네』 (2019, 4월호)

 

 


 

 

이일림 시인 / 바람이 불면 돌아갈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돌아갈 수 있다

 

철제다리 위 비에 젖은 낙엽들, 짓이겨진 것도 있고 아직 깔깔한 가을꽃도

있다 이대로는

아무리 땅과 가까이 있다 해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자연이 될 수 없어

슬픈 뒤태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 것이다 바람이 아니 불 리 없고 저 계곡 끝까지의

바람이 아니 길리 없다 바람이 불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어느 고승이 오르던 길,누구는 봉황이 날아 앉은 자리다 하고

혹자는 부처의 소리가 들렸던 자리다 하여도 율사는 최고 높은 곳보다 가장

낮아질 때의 가장 높은 곳을 보았을 것이다

 

봉정암 오르는 길 추적추적 일박 이일, 잃어버린 신발 주인은 잊어버린

자신을 찾아 맨발로 내려갔다가 잊어버린 통속(通俗)을 찾으러 다시 올

것인가 주인 아닌 주인임을 알았듯이

 

가을바람이 불다 빙벽에 막혔던 이 바람길은 하늘 아래 무한하게 펼쳐진

마음의 울긋불긋한 멍석이어서 천변 에돌던 나도

바람이 불면 돌아올 수 있다

 

―월간 『시인동네』 (2017년 11월호)

 

 


 

이일림 시인

경남 고성 출생. 부산대 세무회계학과 졸업. 창원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 2008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비의 요일은 지났다>